라이벙 정도전과 이방원
- 최초 등록일
- 2015.05.07
- 최종 저작일
- 20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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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이방원의 왕권중심주의
1. 시대적 상황
2. 왕권중심주의의 필요성
Ⅲ. 정도전의 재상중심주의
1. 정도전의 기본이념
2. 재상중심정치의 필요성
Ⅳ.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여말선초(麗末鮮初)라는 미증유(未曾有)의 난세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탄생시켰다.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반원(反元)개혁운동부터 이방원(1367~1422)이 왕권을 안정화시키기까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일어난 수많은 일들은 사극과 소설의 주요 소재로 쓰이기도 하였다. 1392년, 5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려(高麗)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조선(朝鮮)’이 한반도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조선은 이성계로 대표되는 신흥무인세력과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신진사대부들이 힘을 합쳐 이룩한 나라이다. 즉, 성리학 사대부들의 머리로 무인세력의 힘을 이용하여 역성혁명에 성공한 것이다. 신진사대부들은 숭유억불(崇儒抑佛), 친명사대(親明事大)를 국가의 기본 방향으로 잡아 국가를 운영하였고, 그 중심에는 삼봉(三峰) 정도전( 1342~1398)이 있었다. 그는 전제개혁 당시에 모든 농민에게 모든 토지를 균등하게 무상분배하자는 계민수전(計民授田)과 노예해방을 주장하는 등, 현시점에서 봐도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방원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고려 멸망 전에 이성계의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려 하였던 정몽주(鄭夢周)를 기습적으로 참살하며, 조선 건국에 가장 공이 크다고 평가되는 인물이다. 이후 그는 제1, 2차 왕자의 난을 거쳐 제3대 왕 태종(太宗)으로 즉위하게 된다. 이방원과 정도전의 갈등이 가장 표면으로 드러났던 시기는, 이성계가 신덕왕후 강씨의 막내아들인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지목했던 때였다. 이성계의 장자였던 이방우(李芳雨)가 조선 건국 1년 후에 사망하였으므로 장자 승계의 원칙이 불가능해졌고, 따라서 가장 공이 큰 아들이 세자에 오르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장자도 아니고, 조선 건국에 아무런 공도 없는 이방석을 세자로 세웠다.
참고 자료
조유식,정도전을 위한 변명, 휴머니스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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