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분열과 새 교단의 탄생
- 최초 등록일
- 2015.06.24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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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장로교의 분열
1) 예수교장로회(고신)
2) 기독교장로회
3) 예수교장로회(통합)와 예수교장로회(합동)
2. 감리교의 분열
3. 성결교와 침례교의 분열
1) 성결교의 분열
2) 침례교의 분열
4. 새로운 교단의 등장
5. 느낀 점
본문내용
장로교 최초의 분열이 시작된 경남노회에는 재건 당시 출옥성도(한상동, 주남선 등), 적극적 친일활동 목사(김길창 등 일부 목사), 소극적 신사침배자(대다수)의 세 부류가 있었다. 경남노회는 과거 청산을 위해 <목사•전도사•장로는 일제히 자숙하면서 교회를 사직하고, 자숙 기간이 종료되면 시무투표를 통해 그 진퇴를 결정한다>는 자숙안을 제시했다(교역자 대상). 자숙안은 내부 반발에 부딪혀 사실상 폐기되었으나 주남선이 노회장으로 추대(제47회 경남노회, 1945. 이하 ‘제’, ’경남노회’ 생략)되며 다시 과거 청산의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한편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신학교 건립운동이 추진되었다. 당시 장로교 유일의 조선신학교(경기노회 산하)는 신사참배를 허용했으며 신학적으로 개방적 색체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상동은 평양신학교의 계승을 표방, 1946년 9월 고려신학교(교장 박윤선)를 세웠다. 고려신학교의 개교와 더불어 일제 말에 추방된 선교사들이 재입국 하였는데, 소위 메이첸파로 불렸던 이들은 미국 북장로교에서 분립한 근본주의 교단(미국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 출신으로 자신들의 신학 수호를 위해서는 분열도 감수할 수 있는 성향의 소유자들이었다. 이들은 신사참배 전과를 청산하지 않은 총회의 법통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출옥성도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선교사들과 출옥성도간의 교류가 강화되는 동안 김길창이 노회장으로 당선(48회, 1946)었으며 노회는 고려신학교의 인준을 취소했다. 한상동은 노회 탈퇴로 맞섰으며 경남노회 소속교회들이 한상동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자 1947년 3월의 임시노회는 노회장 김길창 이하 전체 임원을 사퇴시키고 출옥성도 중심의 교회재건안을 재확인했다.이러한 흐름은 박형룡의 고려신학교 교장직 사퇴(1947년 10월 취임)로 다시 역류하기 시작했다. 박형룡은 고려신학교를 총회산하에 두고 싶어했으나 메이첸파 선교사들의 비협조로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사퇴했으며, 교려신학교는 박윤선을 다시 교장에 임명한 후 메이첸파 선교사들을 교수로 임용, 근본주의적 신학 색채를 강화시켰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