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주의 교육의 발달 - 피히테의 교육사상, 슐라이에르마허의 교육사상, 오웬의 교육사상
- 최초 등록일
- 2015.10.08
- 최종 저작일
- 20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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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피히테의 교육사상
II. 슐라이에르마허의 교육사상
III. 오웬의 교육사상
1. 성격형성론
2. 유아학교
본문내용
교육은 국가가 관리해야 하는가? 교회가 관리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유럽에서는 오랫동안 교회가 담당해야 한다는 사고가 지배해 왔다. 따라서 중세 이래로 유럽의 학교는 종교적인 학교들이었고, 교육은 종교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교회가 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신교 국가들에서는 국가가 교육을 관리하여 갔으나 그것은 종교적인 통치의 일환으로서의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의 발전과 함께 점차 국가에는 교회와는 다른 독자적인 국민 교육의 과제가 있다는 생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국가는 그 국민의 사회적인 의무와 직업의 수행에 필요한 지식을 전수하고, 덕성을 형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고조되어 갔다.
<중 략>
피히테는 수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가난과 싸우면서 성장하였다. 그는 1780딘 예나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스위스의 쮜리히로 가 가정교사로 지냈다. 그는 이 기간 중 두 번이나 페스탈로치를 방문하여 그의 교육법을 연구하였다.
그는 1792년 “계시비판”을 간행하였으나 칸트의 저서로 오인할 정도였다고 한다. 칸트는 즉시 피히테의 것임을 해명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일약 유명해졌다고 한다. 그는 1794년 예나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어 5년간 재직하였다. 그러나 무신론자란 비난을 받고 에르랑겐 대학으로 옮겼다.
<중 략>
오웬은 북웨일즈의 직물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영리하였고 독서를 좋아하였다. 그는 학교교육이라고는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는 9세 때 런던으로 가 상점 점원 노릇을 하며 손수 노동자들의 무지와 빈곤을 목격하였다. 그는 14세 때 맨체스터의 셔트필드 상회에 취직을 하여 장사 방법, 직물 취급법 등을 익히는 한편 독서에 몰두하였다.
오웬은 21세 때 맨체스터의 직물공장에서 500여 명의 직공을 관리하는 지배인이 되었다. 이어 29세 때 뉴 라나크 방직공장의 관리인이 되었다. 오웬은 방직공장을 관리하면서 노동자들의 환경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