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성리학자 임윤지당의 삶 한국여성사
- 최초 등록일
- 2016.01.07
- 최종 저작일
- 20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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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후기 성리학자 임윤지당의 삶
목차
1. 여성 성리학자를 만든 가정사와 그녀의 삶
2. 임윤지당이 보고, 겪고 있던 시대 풍경
3. 임윤지당에게 큰 즐거움이던 학문, 그리고 결과물인 『윤지당유고』
4. 주목받아 마땅한 윤지당과 여성사를 배우는 21세기 한 여성의 생각
5. 참고문헌
본문내용
18세기는 17세기보다 다양한 서민문화가 꽃피었다. 예를 들어 탈춤, 풍속화, 판소리, 민화, 한글소설 등이 만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들이 당시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여성들은 주로 한글 소설에 관심이 많았으며 한글소설의 주된 독자층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17세기에 비해서 18세기에 자주 글을 접하고, 글의 이해가 가능한 여성들은 더욱 많아졌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수준 높은 학문, 더 나아가 당시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성리학 연구까지 이룬 여성들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임윤지당과 강정일당이다. 이 과제에서는 임윤지당의 저술과 삶을 바탕으로 비판적 시각에서 그녀를 살펴보기로 하였다.
<중 략>
임윤지당은 1721년에 양성현감으로 있던 노은 임적(任適, 1685~1728)과 파평 윤씨, 윤부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윤지당의 아버지 임적은 송시열의 수제자로 불리던 권상하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던 인물이다. 그러나 가정 형편 때문에 공부를 채 끝마치지 못하고 과거를 응시하였고 번번이 과거에 실패하여 벼슬에 나갔다. 임적은 1725년 함흥판관의 자리에서는 기생을 매질한 것이 문제가 되어 탄핵 받았다. 그 후 임적은 가족들과 함께 낙향 준비를 하다 전염병에 걸려서 윤지당이 여덟 살 때 생을 마감하였다. 윤지당의 어머니는 부녀자로써의 덕목을 잘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어머니는 임적이 죽은 뒤로 임윤지당을 포함한 7남매를 데리고 이리저리 이사다녔고 전보다 생활은 더욱 가난해졌다. 임윤지당에게 오빠 3명과 언니 1명, 남동생 2명이 있었는데 큰 오빠 임명주(任靖周, 1727~1796)는 벼슬을 하러 서울에 가있었기 때문에 둘째 오빠 임성주(任聖周, 1711~1788)가 자녀들의 교육을 도맡아 하였다. 임윤지당의 교육은 당시 대분분의 가문처럼 교훈서를 통해 이루어졌으나 덧붙여서 형제들과 우애 좋게 경전과 역사책을 토론, 고금의 인물과 정치적 판단을 논평하기도 하였다.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가풍이 있었다는 점과 임윤
참고 자료
김경미.박무영.조혜란(2012),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돌베개,
이혜순(2012). 『조선조 후기 여성지성사』. 이화여대출판부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