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의 리더십에 관한 연구
- 최초 등록일
- 2016.02.15
- 최종 저작일
- 20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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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내가 상해(上海)를 처음 간 것은 2002년이다. 그 이후에도 3~4차례도 더 상해를 방문했었지만, 내가 처음 도착에서 본 상해라는 도시는 나에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포동(浦東)지구에 들어선 우뚝 솟은 현대식 빌딩이며, 다국적 기업들의 간판, 서울에 버금가는 자동차의 수 그리고 이른 아침 공원을 메우는 시민들의 태극권 등, 아직까지는 도로마다 자전거 행렬을 이루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어딘가 촌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자신감과 에너지로 가득 찬 그들에게 나도 모르게 위압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면 무엇이 이 잠자는 거인을 깨운 것일까? 그것은 바로 개혁개방이었다. 등소평의 개혁개방 기치 아래 13억 인구가 일어선 것이다. 개혁개방은 제도와 이념에 구애되지 않고 대외개방을 하여, 다시 말해서 선진국의 자본과 기술을 중화민족의 저력과 문화에 접목하여 21세기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하겠다는 야심찬 전략이다.
목차
Ⅰ. 서 론
Ⅱ. 등소평은 누구인가?
Ⅲ.등소평의 생애
ⅰ)소년시절~프랑스 유학시절
ⅱ)내전과 항일전~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ⅲ)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문화혁명, 모택동의 사망
ⅳ)중국식 사회주의의 전개와 천안문 사건
Ⅳ. 등소평의 정책
Ⅴ. 등소평 정치 리더십의 모순과 한계
Ⅵ. 등소평의 리더십
Ⅶ. 결 론
본문내용
Ⅴ. 등소평 정치 리더십의 모순과 한계
등소평은 1982년 제12차 전국대회를 기점으로 그의 정치적 구상을 실현해 나갔는데 모택동이 누리던 것만큼은 아닐지라도 그에 비견될만한 배타적 권력과 영향력을 통해 정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모택동과 동일한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었다. 바로 파벌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였다. 그는 이 파벌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2선으로 물러나 파벌의 중립자 또는 조정자 정도로 자신의 역할을 제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자승자박을 불러왔다. 중립을 표방한 그로서는 자신이 지목한 후계자라 해도 그를 강력히 뒷받침할 수 없었고 따라서 개혁. 개방은 위기에 직면하였으며 이에 대한 책임을 자신의 후계자라 해도 자신의 후계자에게 물을 수 밖에 없어 정치 수뇌부의 보수적 경향이 조성되었다. 이는 결국 보수파에 의해 개혁, 개방이 추진되는 모순을 가져와 중국식 사회주의의 위기를 자초하게 되었다.
등소평 정치 리더십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것은 1989년의 6.4천안문 사태이다. 이 두 사건은 기본적으로 중국사회주의의 잠재적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등소평이 보여준 리더십의 경직성, 즉 모택동 통치 스타일의 답습이 빚은 결과였다. 즉 모택동의 좌경적 정책을 수정하여 모택동 사상을 완성하겠다는 등소평이 막상 모택동과 같은 위치에 이르자 그와 유사한 정치행태를 보여준 데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등소평은 모택동처럼 개인숭배를 조장하거나 자신의 사상을 학습시킨다든지 대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하여 자신이 주장하는 정치사상과 정책을 관철하려 한다거나 심지어는 반대파에게 이데올로기적 모자를 씌워 제거하고 그를 통해 노선투쟁을 제기하는 등 모택동 시대의 부정적인 유산은 물려받지 않았다.
그러나 모택동이 말로는 우파를 지지하면서도 실제로는 좌파를 지지한 것처럼 등소평이 결정한 모든 정책의 내용은 우경적이고 민주적이지만 그 집행과 관철에서는 좌경적이고 비민주적인 측면을 보여주었다. 이런 비민주적 정책의 실패로 야기된 모든 부정적 결과에 책임을 져야 했으므로 급기야 학생과 시민의 요구를 물리력으로 진압하는 결과를 낳았다.
참고 자료
등소평 리더십과 중국의 미래-김영화, 문원(1995)
불멸의 지도자 등소평-등용-김영사(2001)
작은 거인 등소평-한산벽-열린기획(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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