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변법운동의 전개와 성격
- 최초 등록일
- 2016.03.21
- 최종 저작일
- 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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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戊戌變法運動 이전의 皇帝權力의 二元化
Ⅱ. 戊戌變法運動의 대두 배경
Ⅲ. 戊戌變法運動의 展開
1) 康有爲의 變法理論과 變法運動의 시작
2) 百日維新
3) 戊戌政變
Ⅳ. 戊戌變法運動의 性格
본문내용
Ⅰ. 무술변법운동 이전의 황제권력의 이원화
변법운동의 전개 상황과 실패에서 청조의 황제권력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서태후의 집권으로 인한 황제권력의 이원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청의 전성기인 강희, 옹정, 건륭 시기는 황제의 전제권력을 제대로 행사하고 누린 뛰어난 황제를 잇따라 배출하였기에 가능하였다. 하지만 청말 황위에 오른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고 평가받는 재능과 능력이 없던 청의 아홉 번째 황제 함풍제가 즉위하면서 청조는 황제제도의 몰락과 쇠퇴를 경험하게 되었다.
청의 아홉 번째 황제 함풍제는 함풍 11년 7월 영·불연합군의 북경침략을 피해 승덕의 피서산장으로 피신하였다가 급서하였고, 함풍제가 유일하게 남긴 아들인 동치제의 생모였던 서태후는 함풍제의 형제인 공친왕과 결탁한 신유정변을 통해 청조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함풍제의 황후와 서태후는 각기 자안, 자희태후라는 존호를 받고 나이 어린 동치제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실시하게 되었다. 서태후는 공친왕 혁흔이 자신을 보좌하도록 이끌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고 아울러 자강운동을 추진함으로써 이른바 ‘동치중흥’이라 불리는 청조의 단기적 부흥을 이끌었다. 동치 11년 9월 동치제가 대혼을 치르고, 18세가 된 다음해 동치 12년에 친정을 시작하게 됨으로써 양태후의 청(淸) 나라 때의 제도로서, 천자(天子)가 있어도 태상황(太上皇)이나 황태후(皇太后)가 정무(政務)를 재결하거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일을 말함.
훈정이 끝났지만, 동치 13년 10월 21일 아들을 남기지 못한 19세의 동치제가 요절하였다.
동치제의 급서 이후 ‘서난각회의’에서 황제계승의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서태후는 “반드시 어려야만 제대로 교육을 시킬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의 조카였던 4세의 재첨을 후계자로 선정하였다. 이를 통해 동·서태후의 제2차 훈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동치 10년 6월 28일 순친왕 혁현의 아들로 탄생하였다가, 4세에 후계자가 되어 궁중으로 들어와 황제에 즉위하게 된 광서제는 이후 서태후의 엄격한 관리와 훈도 아래 스승 옹동화로부터 황제로서의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참고 자료
굴천철남, 이양자 역,『중국근대사』, 삼지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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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원 외, 중국사연구 역, 『중국근대사』, 청년사,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