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에 관한 고찰 리포트
- 최초 등록일
- 2016.07.30
- 최종 저작일
- 20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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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수 많은 철학자 중 먼저 정약용이라는 철학자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조선인이라는 점. 사실 ‘철학자’라고 하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때문에 우리 선조 중에서도 뛰어난 철학자였던 정약용선생님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하고 싶었다. 나는 앞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그가 귀양살이를 하면서까지, 정치적으로 배척당하면서 까지 이루었던 학문적 업적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목차
1. 들어가며
2.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
3.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저서들
4. 주요 철학 사상
5. 나의 소감
본문내용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진주목사의 벼슬을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세 이전에 이미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편찬했다. 10세 나이에 경사(經史)를 읽기 시작하고, 16세부터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를 읽었다. 이런 것들은 다산 정약용선생의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정약용 선생은 15세 풍산 홍씨 집안으로 장가를 가면서 서울에 출입하게 된다. 5년뒤인 20대부터 본격적은 입신 생활을 시작하고 22세에 초지에 합격하였다. 이어 성균관에 입학하여 교우관계를 넓혔다.
28세에 대과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갔다.
정약용은 23세에 이벽(李蘗)으로부터 서학(西學)에 관하여 듣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고 전한다. 때문에 천주교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오해를 받았다.
천주교 문제가 터지기 전, 그의 관료생활은 탄탄대로였다. 주교사(舟橋司)의 배다리 설계, 수원성제와 기중가(起重架) 설계 등 빛나는 업적도 많았다. 한때나마 외직으로 내몰리기도 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고마고(雇馬庫) 개혁, 가좌부(家坐簿) 제도 개선, [마과회통(麻科會通)] 저작 등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승승장구하던 정약용도 정조 사후에 완벽히 정계에서 배제되고 잊혀져 갔다.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 1801년(순조 1) 신유사화가 일어나면서 주변 인물들이 참화를 당했고, 손위 형인 정약종도 참수를 당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정약용은 그해 2월에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11월에는 강진으로 옮겨졌다. 18년 동안 긴 강진 유배생활의 시작이었다.
강진에 도착해서 처음 머무른 곳이 사의재(四宜齋)라는 동문 밖 주막에 딸린 작은 방이었다. 그곳에 기거하면서 예학 연구를 시작하였고, 이후 고성사(高聲寺)의 보은산방(寶恩山房)과 목리(牧里)의 이학래(李鶴來) 집으로 전전하면서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808년 귤동의 ‘다산초당’에 자리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천여 권의 서적을 쌓아 놓고 유교 경전을 연구하였다. 그의 이른바 주석 학문인 경학(經學)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참고 자료
네이버캐스트, 정약용,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HYPERLINK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4491"&HYPERLINK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4491"contents_id=4491, 2015-10-22
구글, 정약용 철학
http://mahan.wonkwang.ac.kr/culture/springnon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