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대외관계, 수나라, 당나라와의 전쟁, 전쟁의 경과 정리자료
- 최초 등록일
- 2016.09.22
- 최종 저작일
- 20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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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고구려의 대외관계
Ⅱ. 고구려(高句麗) ․ 수(隋) 전쟁
<고구려의 요서 선공과 수 문제의 고구려 침략>
1. 수문제의 1차 침공
<수 양제의 4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략>
2. 수양제의 2차 침공
1) 인해전술
2) 공성전으로의 변화
3) 고구려 결사대
4) 살수대첩
<고 수 전쟁 이후 고구려의 상황>
Ⅲ. 고구려(高句麗) ․ 당(唐) 전쟁
1) 당군의 전략
2) 안시성 싸움
<고 당 전쟁 이후>
Ⅳ. 고구려(高句麗) ․ 수(隋) ․ 당(唐) 전쟁의 결과
본문내용
Ⅰ. 고구려의 대외관계
중국 역대 왕조는 소위 중국적 세계질서라는 명분으로 동진하면서 고구려를 압박하였으나, 고구려는 요동 확보를 통해 그들의 침략을 저지하였다. 동시에 고구려는 소위 조공(朝貢)이라는 외교 수단을 통해 중국의 문물을 수용하는 한편, 동아시아 세력의 한 축으로 국제적 위상을 지켜왔다. 또한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5~6세기에는 남북조의 분열로 통일된 세력이 없었으므로 당시 대표적인 강국인 북위와의 공존외교로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5세기의 평화 유지로 고구려는 동(고구려), 서(북위) 진영의 맹주로 군림하여 만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고, 중국과 대결할 수 있는 정치 ․ 경제 ․ 군사력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隋)가 통일제국을 성립함으로써 동 ․ 서 진영의 쟁패전은 불가피해졌다.
Ⅱ. 고구려(高句麗) ․ 수(隋) 전쟁
<고구려의 요서선공과 수 문제의 고구려 침략>
남조국가인 진(陳)이 589년에 신흥국가인 수에게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고구려는 대수강경책(對隋强硬策)을 추진하였다. 더구나 역대왕조와 마찬가지로 수 또한 막대한 철과 식량의 생산지이자 중요한 군사적 거점인 요동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므로 두 나라간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고구려 평원왕은 수나라가 건립된 그해에 때를 맞추어 사신을 보냈고 수나라 문제가 대장군 ‘요동군공’이라는 작위를 주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수나라는 고구려의 요동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고구려의 국가지위를 격하시킴으로써 고구려를 자극했을 것이다. 진나라의 멸망 소식에 평원왕이 군사체제를 정비하고 군량을 쌓아 대비책을 마련한 것이 그 근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양 국가 간의 긴장 속에서 589년(평원왕 8)에 수 문제(文帝)는 일종의 선전포고문인 국서(國書)를 보내왔다. 평원왕의 뒤를 이은 영양왕(590~618)은 수와의 일전이 불가피한 만큼 먼저 기선을 제압하고, 상대국의 전쟁유지 능력과 전쟁의 승리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 말갈병 1만을 동원하여 요서를 선제공격한다.
참고 자료
『전쟁과 역사』, 임용한, 혜안출판, 2001, p.220
역사스폐셜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