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긍재 김득신의 생애와 노상알현도에 대한 작품 조사
목차
I. 서론(序論)
II. 김득신(金得臣)의 생애와 화풍
1. 김득신(金得臣)의 생애
1) 생애에 관한 기록
2) 호(號), 화풍, 직위에서 유추되는 성격
3) 가문(家門)
4) 교우관계
2. 김득신(金得臣)의 화풍
III. ‘노상알현도(路上謁現圖)’ 작품 해설
1. 그림의 주제 및 기법
2. 다른 작품과의 비교
1) 김득신의 ‘태수의 행차’와의 비교
2) 김홍도의 ‘취중송사(醉中訟事)’와의 비교
IV. 결론(結論)
참고문헌
본문내용
I. 서론(序論)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 국난을 겪으며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였고, 사회적으로도 많은 혼란을 겪었다. 그런데 공리공론으로 세월을 보내다 외침의 빌미를 제공했던 지배계급들은 두 차례 전쟁을 겪고 나서도 당파 싸움을 그치지 않았고, 부정부패와 서민에 대한 수탈은 오히려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조선후기에 이르러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불만은 한층 높아졌으며, 이들은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사회개혁운동을 시도하였다. 특히 사상적으로는 실학이 유행하면서, 사회문제의 개혁과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실학의 영향을 받아 회화에서도 중국풍의 관념적인 그림에서 벗어나 사실적이면서 한국적인 미학을 갖춘 풍속화가 유행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풍속화는 개혁적 사회의식을 가진 일부 사대부에서 비롯되었지만, 꽃을 피운 것은 중인 계급의 전문 화원들이었다. 조선시대 3대 풍속화가로 불리는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역시 모두 중인 출신이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강력한 왕권을 가진 영·정조 시대에 활약했는데, 덕분에 양반에 대한 풍자와 해학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다. 특히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은 회화적 수준에서는 단원(檀園)과 혜원(蕙園)에 미치지 못하다고 평가되지만, 비판적 사회의식만큼은 이들보다 훨씬 앞선 화가였다. 이에 여기에서는 그의 생애와 화풍을 살펴보고, 비판적 사회의식을 담은 작품으로서 ‘노상알현도(路上謁現圖)’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II. 김득신(金得臣)의 생애와 화풍
1. 김득신(金得臣)의 생애
1) 생애에 관한 기록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생애는 오세창(吳世昌)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과 유재건(劉在建)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기술돼 있다. 먼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는 “자(子)는 현보(賢輔), 호(號)는 긍재(兢齋), 본관은 개성(開城)이다. 화원인 복헌(復軒) 김응환(金應煥)의 종자(從子)이며, 한종일(韓宗一)의 생질(甥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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