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 태백산맥 독후감
- 최초 등록일
- 2017.04.01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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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태백산맥의 시작은 정하섭의 당의 명령을 받아 벌교로 잠입하기 위해 자신의 예전에 살았던 마을에 무당의 땅 소화를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망을 억제해 가면서 당의 명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소화를 이용하는데, 소화는 예전에 정하섭에게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나면서 그를 도와준다.
여순사건으로 좌익에 의해서 장악했던 벌교를 군경 진압군이 점거하면서 좌익세력인 염상진 · 하대치 · 안창민과 함께 조계산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곧 궁벽한 율어면을 점거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해 해방구로 선포하여 당의 임무를 수행한다.
여기서 나오는 ‘여순사건’에 대해서 궁금해 졌다. 우선,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전라도 지역의 전반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해방이 되자 여수에서는 여수지역 청년 33명이 해방청년동맹을 결성했다. 문성휘를 중심으로 한 해방청년동맹은 검은 제복을 입고 엄격한 상명하복의 규율 아래 행동대를 두고, 치안유지 활동을 벌였다. 여수의 건국준비위원회은 8월 20일에 만들어졌는데, 건준 위원회의 주도계층은 우익세력으로 소수의 좌파세력이 거기에 동조하는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미군의 견제를 덜 받았다. 1946년 5월까지는 우익세력이 우세한 속에서 좌익 활동이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좌우가 큰 마찰 없이 공존하고 있었다.
농민운동은 일제하 농민운동사에서 상당한 비중을 갖고 있던 순천지역은 순천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진 조직은 건국준비위원회였는데, 다른 지역과는 달리 좌익 세력이 완전히 배제된 채 김양수를 중심으로 한 우익 인사들이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이 빠르게 결집했고, 더욱이 미군이 직접 주둔했기 때문에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지만, 좌익 또한 결집력이 높아 상호 갈등이 심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미군정의 인위원회 탄압과 식량공출에 대한 민중들의 반발은 1946년 대구를 시발로 하는 10월 항쟁으로 폭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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