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영화 감상문 - 군용열차, 지원병, 집없는 천사
- 최초 등록일
- 2018.01.28
- 최종 저작일
- 20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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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1. 들어가며
2. 배경 설명
Ⅱ. 본론
1. <군용열차>(軍用列車)(1938)
2. <지원병>(志願兵)(1941)
3. <집 없는 천사>(1941)
Ⅲ. 결론
본문내용
1. 들어가며
1876년 강화도에서 조일수교조약을 체결하면서 한반도에도 개화의 흔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사진과 영화 역시 등장한다. 조선에서 영화에 대한 기록은 1900년대부터 등장한다. 이 당시에는 조선은 영화제작은 하지 않았고 주로 해외의 영화들을 들여 관람하는 데에 불과했다. 1901년 9월 14일자 《황성신문》논설에는 ‘활동사진(活動寫眞)’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이 당시에 영화가 이미 상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3년에는 현재로서는 가장 오래된 영화광고가 등장하기도 한다.
영화의 기원이 1895년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만들어진 ‘열차의 도착’임을 생각하면 아주 뒤쳐진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게 되며 조선에서의 영화제작은 1920년대에나 시작된다. 유수의 열강들이 이미 19세기부터 제작을 시작했던 것과 비교하면 꽤나 늦은 출발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늦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영화계는 세계유수의 영화제에서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며 영화 시장 역시 큰 시장에 편입되는 등 큰 발전을 이루어냈다. 대한민국이 험난한 근현대사를 겪는 와중에도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것처럼 영화 역시 그러한 성과를 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빠른 발전은 여러 부작용을 드러냈다. 사회적으로는 삼풍백화점 붕괴와 성수대교 붕괴 등의 사고에서부터 정치적으로는 유신 및 군부 독재 등의 다양한 부작용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러한 부작용 중의 몇몇은 여전히 남아있는 듯하다. 세세한 성찰 없이 무조건 적인 발전에만 집착한 결과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성찰은 특히 덜한 듯하다. 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일제 강점기에 변절을 하고 친일에 앞장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는 윤동주와 이육사, 나운규만을 기억하며 그들과 마치 동화된 양 환각에 빠져있다. 때문에 이 시기의 영화를 감상하고 성찰하고자 했다.
근현대사를 직접적으로 다룬 많은 영화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러한 사건을 다룬 영화가 아닌 그 시대에 제작된 영화에 대한 감상을 적으려는 이유는 보다 정확한 성찰을 하기 위함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