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 최초 등록일
- 2018.12.05
- 최종 저작일
- 20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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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6.25 전쟁 발생원인
2. 남한의 준비상태
3. 6.25 전쟁 때 주변 국가들은 어떤 역할을 했나 (미국 소련 중국)
4. 6.25전쟁이 대한민국에게 주는 교훈
본문내용
1943년 12월의 카이로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였고 이는 다시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재확인되었다. 다만, 독립은 ‘적당한 시기에’ 이룩한다는 조건부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은 항복하였고, 그 통치 지역이었던 한반도는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미·소 양군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분할된 상태로 미·영·소 3국 외상은 그 해 12월에 모스크바에서 회동하고 한반도에 5년 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민은 맹렬히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좌파세력이 소련의 지령을 받고 찬탁으로 돌아섬으로써 정치적인 혼란이 일어났다. 한국문제가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직면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아무런 해결책도 강구하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1947년 9월에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뿌리치고 한국 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에 제기하였다. 이로써, 38선을 경계로 한 남북한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갈등마저 겪으면서 국제 무대에 노출되었다. 1947년 11월에 열린 유엔총회에서는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사령관은 1948년 초에 활동을 개시한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였다. 이에 유엔소총회에서는 선거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의 총선거를 결의하여 그 해 5월에는 남한만의 선거가 행해졌고, 8월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해 12월의 제3차 유엔총회에서는 한국을 총선거가 실시된 합법정부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여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실시하여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함에 따라 소련을 비롯한 공산 여러 나라가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