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장례 문화 : 풍습과 변화의 흔적
- 최초 등록일
- 2019.06.21
- 최종 저작일
- 20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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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유교, 조선시대 장례문화의 핵심
2. 조선 왕조의 국영 장의사, 귀후서
3. 이승에서의 마지막 옷, 수의
4. 사례편람을 통해 보는 조선시대의 장례절차
5. 왕, 당대 최고 권위자의 죽음
본문내용
계층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도 모두에게 평등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죽음이다. ‘죽음’을 이해하고, 떠나간 사람을 보내주는 문화는 각 나라와 시대, 또 사람마다 다르다. 자동차로 이동하는 현대와 말과 가마가 이동 수단이었던 과거를 공통적으로 잇는 ‘죽음’에 대해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들의 고유한 문화와 풍습을 이어왔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장례 문화의 특징을 정리해보았다.
유교, 조선시대 장례문화의 핵심
유교는 조선의 국가 이념으로, 장례 문화에도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민간신앙과 불교가 만들어 낸 장례 풍습들은 유교의 풍습으로 대체되었다. 그 예시로,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불교의 장법인 화장이 금지되었다. 화장 금지에 대한 논의는 조선 개국이 거의 확정되었던 고려 시대 말기 공양왕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신진사대부들의 화장금지에 대한 상소가 이어졌고, 삼년상 등 상제례를 유교이념에 맞게 법령으로 제정하였다. 법령을 제정한 이후에도 화장은 여전히 민간에 팽배해 있었고, 세종과 성종대에도 화장에 관한 논쟁은 이어져왔다. 또,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여러 제도가 유지되던 상태였으나, 성종 대에 <국조오례의>가 완성되면서, 국상에서는 유교적 상제가 자리를 잡았다.
조선 왕조의 국영 장의사, 귀후서
귀후서는 관곽 제작과 장례 물품 공급을 담당하던 관서이다. 최초로 국가에서 운영하는 장례 담당 기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귀후서 이전에도 고려 왕실에서 장례를 도맡던 관곽색이라는 기관이 존재했다. 관곽색은 귀후서의 모태가 되는 기관으로 그 이름을 관곽색, 관곽소, 시혜소, 귀후소로 여러 번 고쳐 귀후서가 되었다. ‘귀후’라는 이름의 어원은 무엇일까? 증자의 민덕귀후(民德歸厚)라는 말을 따온 것인데 죽은 사람을 추모하고, 그 예를 다하면 백성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백성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간다’는 아랫사람들이 교화되어 그 덕이 후함을 의미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