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산업혁명, 폭력과 점진주의
- 최초 등록일
- 2019.12.28
- 최종 저작일
- 20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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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국의 산업혁명, 폭력과 점진주의의"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농촌 지역의 자본주의로 전환에 영향을 미친 귀족주의의 추진력
Ⅱ. 내란의 농업적 성격
Ⅲ. Enclosure와 농민층의 파괴
Ⅳ. 자본주의의 승리를 위한 귀족의 통치
참고 문헌
본문내용
영국의 산업화 과정이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 체제 속에서 절정에 이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의 영국은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로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으며, 언론의 자유나 정치적 반대자에 대해 미국보다도 오히려 관용적인 태도를 가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관용에는 영국의 지배 계급의 귀족주의적 성격이 분명히 있는 것은 사실이다. 왜 이러한 상황이 조성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나 이 장에서는 산업화의 전환 과정에서 농촌 지역의 여러 계급들이 담당한 중대한 역할들을 살펴보는 데 있다.
우리는 영국에는 정치적, 경제적 분쟁들을 평화적이고도 민주적인 과정을 통하여 해결하는 영국적인 특수한 능력이 있다는 일반적인 통념에 신화적인 요소가 있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어떤 신화적인 요소도 있지만 부분적인 진실성도 있다. 신화를 단순히 폭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국의 민주주의 과정의 출발점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영국의 근대 세속 사회는 중세의 봉건제도와 카톨릭 교단의 왕성하고도 복잡한 과잉 성장을 통하여 서서히 일어나게 되었다. 즉, 농촌과 도시에서 상업의 중요성이 점점 높아지고 봉건제도가 와해되어가고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절대 군주제로 대치되어 가는 것을 나타내는 몇 가지 징후가 14세기이래 계속 나타났다. 먼저 영국에서는 양모 교역이 행해졌는데 중세 말에 이르면 양질의 양모를 생산하는 최대 국가가 되었다. 이 양모 교역은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정치적 영향력은 농촌이 더욱 뚜렷하였다. 두 번째는 1348-49년의 흑사병은 영국의 인구를 대폭 감소시켰으며, 또한 노동력을 감소시켰다. 이것은 또한 종교적 반란과 심각한 농민반란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세 번째는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소작 관계가 더 이상과 영주와 평민을 하나로 묶는 결속력이 되지 못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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