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일본 제국주의의 종교정책과 이데올로기 통합"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동화주의와 통제적 종교정책
1. 교파신도의 조선 진출과 기독교
2. 「포교규칙」 제정을 통한 종교통제
Ⅲ. 내지연장주의와 회유적 종교정책
1. 통치방침의 변화와 회유적 종교정책의 전개
2. 조선신궁의 건립과 제신 논쟁
Ⅳ. 조선무속의 재발견과 조선의 지역성 대두
1. 심전개발정책의 전개와 신사제도의 강화
2. 쿠니타마노카미(國魂神)의 봉재와 조선의 지역성 대두
3. 고유신앙(무속)의 재발견과 현지주의
Ⅴ. 전시체제기 황민화정책의 전개와 이데올로기 통합의 종언
1. 황민화정책의 전개와 신사참배
2. 이데올로기 통합의 종언
Ⅵ. 결 론
본문내용
이질적인 사회구성원을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통합의 원리가 필요하다. 근대 국민국가는 통합원리로서 민족주의를 활용했고, 이를 통해 국민국가의 영토 안에 있는 구성원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국민국가의 규모를 넘어서 구축되는 제국은 어떠했을까?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제국주의는 네셔널리즘의 발전이며 동시에 그 부정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제국에 있어서 민족주의는 통합 원리로서 유효성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제국은 그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팽창하기 위해서 식민 모국뿐만 아니라 식민지의 구성원들을 동원해야만 했다. 따라서 제국은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제국 통합을 위한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제국 통합을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문명(근대성)과 종교를 활용했다. 문명과 종교는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면서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기제로 작용했다. 세계체제의 중심부로서 헤게모니를 갖고 있던 서구 제국주의가 설파한 문명과 종교는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일종의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 할 수 있었다. 반면 세계체제의 半중심부였던 일본의 경우 서구 제국주의와 달리 문명과 종교의 보편성을 획득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선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존재로 인해 문명 그 자체를 상징할 수 없었다. 일본의 종교(국가신도)는 국민국가 건설을 위한 통합 이데올로기(천황제 이데올로기)로서 유효했지만 국민국가 단위를 넘어서는 순간 유효성을 상실한 가능성이 높았다. 이처럼 제국 일본을 통합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는 시작부터 불안정성을 노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제국 일본은 제국 통합 이데올로기의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고심하면서도 식민지민의 정신세계를 해체·재구축해야 했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다양한 종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 일본의 종교(국가신도)가 수용될 수 있는 공간은 매우 협소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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