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전쟁시기의 한국미술
- 최초 등록일
- 2020.08.19
- 최종 저작일
- 20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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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50년 남북전쟁시기의 일어났던 일과 미술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았다.
목차
1. 들어가며
1) 주제선정 계기
2) 한국전쟁의 원인과 진행
3) 한국전쟁이 미술계에 미친 영향
2. 그림에서 보이는 한국전쟁
1) 이철이(1909-1969) <학살> 1951년
2) 박고석(1917~2002) <범일동 풍경> 1951년
3) 박수근(1914~1965) <기름장수> 1953년
4) 김환기 <피난열차> 1951년
5) 유병희 <도솔산 전투> 1951년
6) 문학진 <참호(foxholes)> 1953년
3. 마치며
1) 작품으로 보이는 한국전쟁 시기 미술의 특징
2) 느낀점
4. 참고자료
본문내용
일본이 항복하기 이전,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조선에 대한 독립이 재확인되었지만 ‘적당한 시기에’ 이룩한다는 조건부였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은 항복하였고, 일본의 통치를 받았던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 양국의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을 분할해 신탁통치를 하게 되었다.
그 후에 유엔총회에서 파견한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사령관이 입북을 거절하였다. 이에 5월에 남한 단독으로 선거가 행해졌고, 8월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여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로써,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이 각각 별개의 정부를 수립하면서 국경선이 되어버렸다.
이 정세에서 1950년 6월 25일 새벽부터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고, 북한군 기동부대가 서해와 내륙에서, 유격대와 육전대는 강원도와 동해안 지역에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당시 한국군은 비상경계령이 하루 전이었던 24일(토) 해제되었고, 주말을 맞이해 많은 병력이 외출·외박을 나가서 부대에 남은 병력은 많지 않았다. 한국군의 방어 전선은 곧 붕괴되면서, 전쟁 발발 3일이 지난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에 진주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작전 지휘권을 위임했으나 한국군과 연합군은 개전 한 달여 만인 8월 1일 낙동강 선까지 후퇴하였다. 그 후로 UN군은 9월 15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3개월 만인 9월 27일 연합군은 서울을 탈환하였다. 하지만 중국군의 참여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로 인해 상호피해가 늘어나고 나라사정이 열악해지자,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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