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흑사병, 농민폭동
- 최초 등록일
- 2020.10.28
- 최종 저작일
- 20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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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년전쟁, 흑사병, 농민폭동"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백년전쟁 [ Hundred Years' War , 百年戰爭 ]
2. 흑사병 [ Black Death , 黑死病 ]
3. 농민 폭동 [ Peasants’ Revolt , 와트 타일러의 난 ]
본문내용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사이에 유럽의 두 강대국이었던 영국(잉글랜드)과 프랑스는 100년 넘게 전쟁을 벌였다. 정확히는 1337년부터 1453년까지, 프랑스를 전장(戰場)으로 하여 여러 차례 휴전과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116년 동안 단속적으로 계속되었다. 영국은 1066년 노르만 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 내부에 영토를 소유하였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오랫동안 분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328년 프랑스 카페왕조의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자, 그의 사촌 형제인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에 대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모친이 샤를 4세의 누나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국 간에 심각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플랑드르에 수출해오던 양모(羊毛) 공급을 중단하고, 그 보복으로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인 기옌, 지금의 가스코뉴 지방의 몰수를 선언하였으며,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공식적인 도전장을 띄우게 되었다.
당시 유럽에는 플랑드르라는 지방이 있었는데 이곳은 플랑드르는 프랑스 영토 안에 위치하여 프랑스의 종주권(宗主權) 아래에 있었지만, 중세를 통하여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지대로서 번창하여, 원료인 양모의 최대 공급국인 영국이 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이렇게 플랑드르 지방은 양털로 옷을 만드는 양모 산업과 유럽 최대의 포도주 산지로 유명하였기 때문에 영국으로 하여금 많은 경제적 자금을 벌게 해주었기에 애지중지 되는 지역이었고 프랑스는 언제나 눈독 들이는 곳이었다. 이런 문제로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따라서 전쟁의 근본적 원인은 이 두 지방의 쟁탈을 목표로 한 것이다.
프랑스 의회는 에드워드 3세를 무시하고 필리프 6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했다.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백년전쟁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크레시전투(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백년전쟁 - 영토를 두고 100년 넘게 싸우다 (재미있는 전쟁 이야기, 2014.12. 5., 양오석, 조봉현, 권성호, 서울대학교 뿌리깊은 역사나무)
[네이버 지식백과] 흑사병 (Basic 중학생을 위한 사회 용어사전, 2007. 7. 10., 임성재)
[위키 백과사전] 흑사병
[네이버 지식백과] 와트 타일러의 난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2002. 9. 25., 강상원)
[위키 백과사전] 농민 폭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