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과 실패의군주 공민왕
- 최초 등록일
- 2020.11.11
- 최종 저작일
- 20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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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끄적이다가 찾음
목차
Ⅰ. 머리말
Ⅱ. 공민왕의 탄생과 재위
Ⅲ. 권문세족의 대두
Ⅳ. 공민왕의 반원정책
Ⅴ. 신돈의 등용
Ⅵ. 맺음말
본문내용
Ⅰ.머리말
공민왕 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면 우리 모두는 반원자주정책을 떠올릴 것이다. 그는 22세의 나이로 고려의 왕으로 재위하였고, 그가 세자일 때 맞아들인 원나라 공주가 정식 왕후가 되었다. 그는 헌신적인 사랑꾼이었는데, 공민왕의 아내인 노국공주는 그를 원 나라 제후국의 왕으로서가 아닌 자신의 부군이자 고려의 왕으로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런 공주의 입장은 1356년 반원개혁의 단행에서 공민왕을 지지함으로써 결정적으로 굳어졌으며, 이후 공주는 원 나라 출신 공주가 아닌 공민왕의 왕후일 뿐이었다. 그런 까닭에 흥왕사의 난에서도 공주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왕을 죽음의 순간에서 지켜주기도 하였다. 공민왕도 선대의 왕들과는 달리 공주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혼인한지 10년이 지나도록 대를 이을 왕자는 물론 공주도 얻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후궁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후사를 얻지 못하였던 그들에게 16년만에 아이가 생겼지만 불행히도 아이가 태어나는 도중에 아이는 물론 공주도 함께 죽었다. 슬픔의 아픔을 표현할 틈도 없이 그에게는 개혁과 대외정책이라는 막중한 임무가 있었다.
그의 재위기간동안 많은 개혁과 대외정세의 변화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이야기는 반원자주정책인데, 그는 즉위한 이후 원명교체기의 대륙정세를 이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책을 펴서 기철일파등의 부원세력을 제거하고 정동행성이문소를 혁파했으며, 쌍성총관부를 회복하여 철령이북의 땅을 되찾았다. 대내적으로는 정동행성을 없애고 인사권을 전리사와 군부사로 돌렸으며,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에 의해 부당하게 자행되던 토지와 노비의 침탈을 막아 왕권의 확립과 국가재정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및 원ㆍ명 교체의 다사다난한 시기였다. 개인적으로는 사랑하는 아내 노국공주가 죽고, 의지하고 신뢰했던 신돈을 권력을 천단했다는 이유로 직접 처단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그 또한 결국 시해당했다.
참고 자료
이형우, 「독단적 개혁가 공민왕과 예정된 실패, 그리고 외세」
민현구, 「공민왕 –개혁정치의 꿈과 좌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