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창제를 둘러싼 대립 세종과 최만리
- 최초 등록일
- 2020.12.01
- 최종 저작일
- 2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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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글창제를 둘러싼 대립_세종과 최만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주제선정이유
2. 세종의 삶
3. 최만리의 삶
4. 한글창제에 대한 대립
5. 세종과 최만리에 대한 평가
본문내용
1. 주제선정이유
세종은 후대에 이르러 가장 성군으로 평가된 인물이다. 그 평가는 세종 사후로부터 계속 이어져서, 세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대한민국에 이르러 민족주의 역사관에 힘입어 이견없이 이전 시대의 평가가 이어졌다. 특히, 한글 창제라는 전후무후한 역사를 창조한 세종은 민족주의 역사관에서 크게 평가되었다. 그에 따라,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한 인물들은 세종의 어진 뜻을 어기고 중국의 글자만을 따라야한다고 주장한 주체성 없는 인물로 묘사되고는 한다. 특히, 세종 대에 한글 창제 반대 상소를 썼던 최만리에 대한 평가는 세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 반비례하여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최만리는 집현전의 부제학, 대제학을 지냈던 세종 대의 주요한 관직을 지냈던 인물로써, 그렇게 단순하게 평가될 인물이 아니다. 그는 무려 17년간 집현전에서 관직생활을 지냈는데, 그러한 인물이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라는 의중을 알지 못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최만리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의 상소는 후대의 평가에서 민족문화의 발전을 반하는 인물로써 과장되었을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세종 대에 있었던 한글 창제에 대한 논쟁에서의 최만리를 다시 보고자한다. 최만리는 어떠한 인물이었으며, 어떠한 맥락에서 한글 창제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섰는지 또, 갑자년에 올린 한글 창제 반대 상소문은 후대의 평가처럼 중국만을 쫓은 사대주의자로서의 면모만을 보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세종의 삶 ; 애민(哀愍)군주 세종
세종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 씨의 세 번째 아들로 태조 6년(1397) 경축 4월에 태어났다.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원칙을 가진 조선에서 세종이 셋째였음에도 왕이 된 이유는, 실록에 따르면 태종 당시 세자였던 장자 양녕대군이 비행을 저질러 폐세자되고, 신하들과 태종의 뜻이 모두 어진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워야한다고 일치하여 세자가 되고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참고 자료
『세종실록(世宗實錄)』
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16.
박홍갑, 『집현전 학사 최만리의 정치활동』, 한국고전번역원,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