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한국 사상계
- 최초 등록일
- 2021.07.26
- 최종 저작일
- 2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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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세기 한국 사상계"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론
1. 국내 정세
1.1 성리학의 한계
1.2 서학의 전래와 탄압
2. 국제 정세
2.1 청나라
2.2 일본
2.3 프랑스·러시아
Ⅱ. 본론
1. 민간 사상
1.1 관제 신앙
1.2 옥황상제 신앙
1.3 미륵 신앙
1.4 정감록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비교적 평화로웠던 유럽과 다르게 19세기의 아시아는 격동의 연속이었다. 역사 깊은 전통과 체제가 산업혁명으로 성장한 서양 열강에 의해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고,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부정부패의 만연화에도 불구하고 사대주의와 대의명분론 등에 매몰된 성리한의 한계, 서학의 전래와 탄압 등을 통해 결과적으로 기존의 체제 구성원들이 조선이라는 나라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체제의 가장 밑에 위치한 백성들은 체제에 대한 불만을 농민운동과 반란으로 표출했고, 이 과정에서 19세기의 사상 역시 백성들의 요구와 시대의 흐름에 부응해 다양한 양상을 취하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19세기에 한국 사상계가 처했던 상황과 시대의 흐름에 부응해 등장한 여러 민간 사상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국내 정세
1.1 성리학의 한계
본래 성리학은 주희(朱子)가 도교와 불교를 비판하면서 그들의 사상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혼과 환생 등으로 구성된 내세관을 부정한 이래로 이들이 지나치게 형이상학에 집착하는 것이 나라를 망친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초기 성리학은 내세보다 현세에 치중한 세속적인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고, 그 교조인 주희는 당대인들에게 조상의 영혼을 모시지 않는다고 해서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조선의 성리학도 이후 이황과 율곡의 대에 이르러 전성기에 이르렀지만 큰 사회적 변화를 동반한 양란 이후 김존해(金尊楷), 심당길(沈當吉), 이삼평(李參平) 같은 기술자들은 일본으로 납치되고 실용적인 학자들이 전란으로 목숨을 잃으면서 성리학을 제외한 여러 학문의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성리학은 현실에 대한 인식보다는 이민족과 중화의 차별을 강조하는 화이론적 명분론을 위시로 하는 대의명분과 사대교린에 집착하면서 과도한 이론과 관념론적인 문제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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