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대 국제 정세와 사상적 혼란
- 최초 등록일
- 2021.07.26
- 최종 저작일
- 2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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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860년대 국제 정세와 사상적 혼란"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1860년대 국제 정세
1) 청나라
2) 일본
3) 프랑스
4) 러시아
2. 1860년대 사상적 혼란
1) 성리학의 한계
2) 민간 사상
3) 서학의 전래와 탄압
본문내용
1860년대 국제 정세
청나라
1840년 발발한 제1차 아편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842년 남경조약(南京條約)을 통해 영국에게 광주를 포함한 5개 항구를 개항하고, 홍콩(香港) 섬의 할양과 무역 독점권을 넘겨주었다. 이는 서양 열강에게 최초로 무력에 의한 개항이었던 남경조약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큰 가시적인 효과를 얻지 못했다. 영국의 주된 상품이었던 면제품은 중국인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았고, 면제품 수출로 인한 이익보다 아편 수출로 인한 이익이 많은 상황에서 중국인들이 자체적으로 아편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의 무역 적자는 점점 커져갔다. 반면 중국의 차에 대한 영국의 수입량은 급증하면서 제1차 아편 전쟁 이전과 비교해 무역의 구조적인 문제가 개선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진 영국은 미국,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에 남경조약의 개정을 요구했다. 청나라는 서양 열강 요구를 거절했고, 영국은 마침 광저우 인근에 대기하고 있던 영국인 소유의 해적선 애로호(Arrow)가 제압되는 과정에서 영국 국기가 훼손되었다는 애로호 사건을 빌미로 1856년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영국과 함께 남경조약의 개정을 요구했던 프랑스는 같은 해에 자국 선교사가 청나라에 의해 처형된 것을 빌미로 영국에 이어서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했다. 당시 청나라는 기독교에 영향을 받은 배상제회(拜上帝會)가 가난한 빈민들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제1차 아편 전쟁 이후 남경조약으로 인해 청나라 내의 교역로 변동으로 인한 상업 종사자들이 대거 실직하고, 여러 사회적 요인으로 들끓기 시작했던 도적들을 흡수한 끝에 1850년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태평천국의 난(太平天國之亂)과 비슷한 시기에 화북 지역에서 발생한 유민과 도적들의 반란인 염군의 난(捻軍之亂)을 진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태평천국은 초기에 남경을 점령한 이후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을 향해 북벌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1856년 당시에는 지도자 홍수전(洪秀全)이 휘하의 다섯 왕을 이간질하면서 내분에 빠져 있었다.
참고 자료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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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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