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현무문의 난과 조선 왕자의 난의 비교와 정변 이후의 정당성 확보
- 최초 등록일
- 2023.04.25
- 최종 저작일
- 20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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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당대의 현무문의 난과 조선 왕자의 난을 비교하고 두 정변이 일어난 후 당사자들이 어떻게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는지에 대해 작성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I. 머리말
II. 唐代 玄武門의 變
III. 朝鮮 王子의 亂
IV. 두 사건의 비교와 정변 이후의 상황
V. 맺음말
본문내용
I. 머리말
일찍이 국가가 성립한 이후 왕위의 승계는 왕조의 안정과 발전의 중요한 변수였다. 周代에 정해진 중국의 종법체제를 계승하여 한국역사에서도 왕위의 부자상속과 후계를 미리 정하는 태자제도가 三國時代에 이미 확립하였다. 과거 왕위 계승의 원칙은 기본적으로 장자 왕위 계승의 원칙을 따랐다. 왕의 정비의 첫째 아들이 일반적으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계승 원칙은 태자에 봉해진 장자보다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형제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唐 李世民의 경우, 아버지인 李淵을 도와 당을 건국하는데 높은 전공을 세우고 건국에 큰 공헌을 하였지만, 태자에 봉해지는 것은 장남 李建成이였다. 이에 불만을 품고 626년 장남 이건성과 삼남 李元吉을 상대로 長安城 太極宮의 북문인 玄武門에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이연에게 왕위를 물려받는다. 朝鮮의 경우, 太祖 李成桂가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왕자가 아닌 총애하던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에 책봉하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이를 못마땅해 했고, 이중 조선건국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방원의 불만이 가장 컸다. 이에 방원이 1,2차에 걸친 王子의 亂을 통해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왕위를 물려받는다.
앞서 언급한 두 군사 쿠데타는 각기 다른 시대에 발생한 독립적인 사건이지만 비슷한 배경과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졌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레포트 작성을 통해 당대 현무문의 변과 조선 왕자의 난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두 정변의 이후 상황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II. 唐代 玄武門의 變
6세기 말, 대규모 토목공사와 운하 건설, 무리한 高句麗 원정과 실패 등으로 인해 隋가 무너졌다, 당시 이연은 당국공의 직책으로 山西省의 유력자였는데 정국이 혼란해지면서 새로운 황조를 개국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상당한 군사적 경험과 부를 바탕으로 힘을 축적해 나갔다. 기회를 노리던 이연은 617년에 아들인 이세민의 조언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는 성공하여 煬帝를 폐위시키고 恭帝를 즉위시켰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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