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대학교 교양한국사 인물 재평가 레포트
- 최초 등록일
- 2023.06.13
- 최종 저작일
- 20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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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대학교 교양한국사 인물 재평가 레포트"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2. 묘청의 생애와 묘청의 난에 대하여
3. 묘청의 실패 요인과 그 결과
4. 묘청에 대한 재평가와 시사점
5. 맺음말
본문내용
1, 서론
위 인용문은 고려시대 묘청(妙淸)에 관한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의 논평이다. 묘청은 고려 중기 인종 대에 승려 출신으로 왕실 고문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묘청은 흔히 기득권에 반대하고 새로운 사회를 추구한 정의로운 인물로 묘사되는데,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이 글에서는 묘청에 대한 긍정적 역사상을 재고하기 위해 그의 생애와 서경 천도를 주장하고 반란을 일으킨 경위를 알아보고, 그의 실패 요인을 분석한 뒤 마지막으로 역사의 기록과 여러 문헌을 통해 그를 재평가하고자 한다.
2. 묘청의 생애와 묘청의 난에 대하여
묘청은 서경 출신의 승려로서 그가 역사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고려사』에서 1127년(인종 5)에 일관(日官) 백수한(白壽翰)이 추천하여 정계에 등장한 것이 바로 그의 첫 기록이다. 이전에 그가 언제 출생했고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묘청은 같은 서경 출신의 관료들의 지지를 받아 서경천도론을 처음 제기하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개성(당시 고려의 수도)은 이미 기운이 쇠했고 서경에는 왕기(汪錡)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 앞서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왕궁이 불타고 새로 등장한 금나라의 위협으로 점차 민심이 동요하던 상황과 결부되어 인종의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고 곧바로 천도를 위한 준비를 진행시킬 수 있었다. 묘청 등은 천도론을 뒷받침할 근거로 칭제건원론과 금국정벌론을 내세웠다. 곧 서경에 대화궁(大花宮)이 지어지는 등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으나, 끝내 강력한 반대에 밀려 실현되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묘청은 1135년 서경에서 조광(趙匡), 유참(柳旵) 등과 함께 난을 일으키고 대위국(大爲國)을 세우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였다. 그러난 관군에 의해 1년만에 진압되었다. 이 과정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먼저 천도론의 제기와, 그에 따른 천도운동의 추진, 종국에 반란과 진압으로 마무리된다고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묘청 일파 서경천도론의 허와 실], 민현구, 39쪽
『고려사』 열전 권96 윤언이
[중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묘청 관련 서술에 대한 비판적 분석], 이종서, 2014
신채호,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 , 한국사연구초, 을유문화사 재간행,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