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신라의 국가 형성과 발전 - 신라의 고분문화
- 최초 등록일
- 2004.04.28
- 최종 저작일
- 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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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여러 책들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신라의 전체적인 형성과 발전을 쓰고
신라에서 빠질수 없는 고분문화를 첨부하였습니다.
모두들 A+맞으세요^^
목차
<신라의 국가 형성과 발전>
1. 신라의 건국
2. 신라의 발전
(1) 정치·외교 및 경제·사회
①통치구조
②사회구성과 신분제도
③조세와 부역
(2) 종교·문화
3. 신라의 고분문화
본문내용
신라는 중고기에 이르러 중앙집권적 국가로서 통치체제를 갖추어 국왕과 여러 귀족의 일정한 타협 조화 속에서 대내외적으로 크게 발전해 나갔다.
우선 지증왕 때에 이르러 획기적인 발전을 하였다. 502년에 농사를 장려하는 왕명을 공표하는 가운데 우경이 시작된 것은 농업발전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의 발달한 정치제도를 받아들여 국가의 면목을 일신하였다. 종래 다양하게 사용 표기되어 오던 국호를 신라로 정했고, 마립간 대신에 중국식 왕호를 사용한 것, 그리고 505년에 지방제도로서 주군제도를 채택한 것 등은 모두 국가체제 확립에 수반하는 조처들이었다. 대외관계에서도 502년과 508년 두 차례 중국 북조의 북위에 사신을 보냄으로써 382년 이래 120년간이나 단절되었던 중국과의 교섭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법흥왕 때에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율령을 반포하고, 중요 관부를 설치하는 등 신라의 전반적인 국가체제를 법제화·조직화하였다. 520년(법흥왕 7)에 반포된 율령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백관의 공복, 17관등, 골품제 등에 대한 규정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524년(법흥왕 11) 건립된 울진봉평신라비와 550년경에 세워진 단양 신라적성비에는 당시 율령의 수용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율령 제정에 앞서 516년(또는 517년) 군사문제를 전담하는 병부가 설치하고, 531년에는 상대등을 두었으며, 또 이 무렵에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국가의 통일을 위한 사상적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처가 있은 뒤인 536년에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는 신라의 통치체제가 확립되어 대외적으로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진흥왕 때는 이 기반 위에서 대외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킨 시기였다. 이미 532년(법흥왕 19) 김해에 있던 본가야(금관가야)를 병합해, 낙동강 하류지방에서부터 북상하면서 가야 여러 나라를 위협했고, 562년(진흥왕 23)에는 이사부로 하여금 고령의 대가야를 공략, 멸망시킴으로써 기름진 낙동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진흥왕의 정복사업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한강 유역의 점령이었다. 550년 백제와 고구려가 도상설과 금현성에서 공방전을 벌이는 틈을 타서 두 성을 빼앗았다. 이듬해 '개국'이라 개원하고, 백제의 성왕과 공동작전을 펴서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탈취하였다. 신라는 처음 한강상류지역인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군을 점령했으나, 곧 553년에 백제군이 점령하고 있던 한강하류지역을 기습 공격해 한강유역 전부를 독차지하였다. 그리고 554년에는 신라의 약속 위반에 분격해 쳐들어온 백제의 성왕을 관산성에서 살해하고, 3만 대군을 섬멸시켰다.
신라는 한강 유역 점령으로 이 지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얻은 것은 물론 서해를 거쳐 직접 중국과 통할 수 있는 문호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는 중국을 상대로 한 외교에 성공하여 삼국통일을 이룰<font color=aaaaff>..</font>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