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신채호] 신채호(申采浩) 선생의 활동과 학문
- 최초 등록일
- 2004.10.23
- 최종 저작일
- 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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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말
2. 신채호 선생의 활동과 학문
3. 나오는 말
본문내용
2. 신채호 선생의 활동과 학문
선생은 1880년 대전에서 출생하였다. 추천을 받아 성균관에 들어가 박사가 되었을 정도로 수재였고, 성균관의 교수들은 최고의 제자로 선생을 꼽았다. 근대적 학문의 책을 찾아 읽거나, 단발을 주장할 정도로 개혁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민중을 계몽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이십세기 신국민」·「대한의 희망」
하는 글을 쓰며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였고,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 『한국자치제의 약사』, 『국사사론』,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 『을지문덕전』과 『이태리건국삼걸전』 등 민족의 영웅전이나 외국의 영웅전을 썼고, 역사논문등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양양에 힘썼다. 특히 『독사신론』은 후에 일부 수정한 후에 최남선이 발행하던 『소년』에 『국사사론 國史私論』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는데, 이 글에서 이미 그의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순 한글 『가정잡지』를 편집·발행하기도 했다. 28세 되던 1907년에는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조직에 참여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도 참여, 논설을 통하여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30세 되던 해에는 신민회의 방계조직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발기, 그 취지서를 집필하였다. 1910년에는 독립운동을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광복회(光復會)를 조직, 그 부회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권업회(勸業會)에서 기관지 『권업신문 勸業新聞』을 창간하자 주필로 활약하였다. 1913년에는 상해로 가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교육에도 힘썼으며, 이듬해에는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당시 백두산 등산, 광개토대왕릉 답사 등 고구려와 발해의 고적지를 돌아보아 부여·고구려·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임중빈, 『단재 신채호』, 명지사, 1990
강만길, 『신채호』, 고려대학교출판부, 1990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사이버단재신채호기념관 http://www.danjae.or.kr/main.htm
http://www.koreandb.net/KPeople/KPShow.asp?ID=0006498&Typ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