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 최초 등록일
- 2005.03.03
- 최종 저작일
-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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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배경
2.원인
3.경과
4.각국의 태도
5.전쟁의 의의
6.결과
7.한국에 미친 영향
8.러일전쟁의 의의
본문내용
1. 배경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국을 독점하려던 일본의 계획은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에 의해 일시적으로 저지되었다. 일본은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민비를 학살했으나, 반일 의병투쟁을 야기함으로써 더욱 수세에 몰렸다. 또한 1896년 2월 친러파에 의해 아관파천이 단행되고, 친러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일본이 여전히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후 조선의 대외무역에서 일본은 수입의 60∼70%, 수출의 80%를 차지함으로써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권(利權)면에서도 열강에 분할되는 이권을 최혜국대우 조항에 의해 획득하거나 위협함으로써 확보해 갔다.
한편으로는 조선에 대한 경제적 지위를 확실하게 굳히면서 이를 군사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대(對) 러시아 전쟁을 상정한 군비확장에 주력했다.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받은 전쟁배상금 3억 6,000만엔 중 2억 2,000만 엔을 군비확장에 사용하고, 1896~1903년 예산세출의 평균 5 할을 군비로 충당했다. 그러나 일본은 독자적인 힘으로 러시아와 싸워 승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시아에 대한 영국·미국의 이권을 지키는 헌병 역할을 스스로 떠맡고 나섰다. 이로써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외교적·군사적 지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러일전쟁의 막대한 전비 17억 엔 중에서 8억 엔을 영국과 미국에서의 외채모집으로 보충했다.
또한 러시아도 삼국간섭 후 1896년 러·청 은행을 설립하고, 북만주를 횡단하여 치타와 블라디보스토크를 단거리로 잇는 동청 철도(東淸鐵道)의 부설권을 획득했다. 또 1898년 뤼순[旅順]·다롄[大連]을 조차하고 여기에 대규모 해군 근거지를 계획했으며, 조선에 대해서도 1897년 재정고문 알렉세예프와 군사고문을 파견하고, 1898년에는 한·러 은행 등을 설립했다. 그러나 한국 내에서 일어난 이권반대운동과 영·일 양국의 방해로, 알렉세예프는 취임하지 못하고 곧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한·러 은행도 폐쇄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조선으로부터 일보 후퇴하여 만주에 침략의 발판을 굳혔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