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현대사] 인물현대사_김원봉
- 최초 등록일
- 2005.09.21
- 최종 저작일
- 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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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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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 관
2. 어린시절
3. 의열단 단장으로의 활동과 중국 국민혁명에 투신
4. 민족혁명당 총서기와 조선의용대 대장으로의 활동
5. 해방 후
6. 무정부주의(아나키즘)와 약산 김원봉
7. 사회주의와 약산 김원봉
본문내용
약산 김원봉이 신흥무관학교에 온 것은 그의 나이 22살 1919년 6월경이다. 이곳에서 약산은 폭약 기술을 배우고 11월 길림에서 의열단을 창단한다.(처음에는 단장이 아니었으나 제 1차 암살. 파괴 운동의 실패로 선배 간부들이 체포된 후 단의 책임자가 되어 단장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냈다.) 약산이 서간도를 떠나 상해에 온 것은 1920년이며 상해에서의 의열단 활동은 창단 직후부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대대적인 암살과 폭탄투척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이러한 의열단 폭력 활동을 비난하자 약산은 이회영 등 반 이승만의 북경그룹과 가깝게 지내며 의열단이 무조건 폭력을 일삼는 테러조직이 아니라 명확한 이념과 목표를 가진 독립운동단체인 것을 천명하기 위해 신채호에게 의열단의 혁명선언의 기초를 부탁한다. 이렇게 나온 것이 1923년 1월에 발표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이다.
1925년 중국의 반제국주의운동과 민족해방의 진원지인 광동에 혁명가들이 몰려오고 의열단원과 약산도 중국 국민정부의 북벌과 혁명운동에 동참한다. 혁명 열기에 동참한 약산은 광주에 세워진 국민당 정부의 황포군사학교에 1926년 1월 4기생으로 입학, 스스로 군사전문가로 배우며 마침내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한다. 장작림 등 봉천군벌을 물리치면 중국이 통일될 것이고 이러한 열기로 조선도 독립될 것이라 믿고 약산과 많은 조선인이 참여하지만 1927년 4월 장개석의 반혁명으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약산이 20대 후반 중국의 삼민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민족주의, 국제주의 온갖 사상의 시험장인 혁명무대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특히 중국 내의 국공합작은 이후 약산의 활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보수 민족주의자들이 1920년대 무력감에 빠져 사분오열되어 무력증에 빠져 있을 때, 약산은 새로운 젊은 세대로서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로서 전면에 나선다.
이후 의열단의 노선은 북벌운동 참여의 교훈 속에서 국내의 노동대중운동에 관심을 기울여 약산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만들어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하기도 하나 의열단 전체적으로는 민족주체 민중중심의 노선을 지향한다.
의열단이 이때부터는 민족유일당운동 결성에 노력하는 등 자신이 유일한 중심조직이 아니고 전체 혁명운동의 첫 단계로서 의열단 성격을 자리매김한 것이다.
참고 자료
김원봉 연구 염인호, 창작과비평사, 1992
약산과 의열단 박태원, 깊은샘, 2000
인물로 보는 항일무장 투쟁사 역사문제연구소 편, 역사비평사, 1995
경희대학교 총민주동문회-khmindong.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