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임오군란
- 최초 등록일
- 2005.10.06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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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오군란에 대해 짧게 설명한 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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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부패한 봉건 지배 세력에 맞서 간헐적으로 등장하던 도시 하층민들의 투쟁은 외래 침략자들에 대한 저항운동과 결합하여 마침내 1882년(고종19) 7월 서울에서 도시 하층 민중이 중심이 된 대규모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폭발하였다. 이것은 구식 군인들이 민씨정권의 신식 군대의 양성과 군제 개혁에 불만을 품던 차에 급료가 13개월이나 밀린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임오군란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도봉소(都捧所)사건으로 선혜청(宣惠廳) 창고 도봉소에서 무위영(武衛營)소속 구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급료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소한 충돌을 가리킨다. 이 당시 서울에 있던 군인들은 그 대부분이 왕십리, 이태원 일대의 도시 하층민 출신으로 한 달에 쌀 4말 정도를 급료로 받고 번을 갈라 근무하는 고용군인이었다. 하급 군인들은 이 급료만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려웠기 때문에 각종 부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이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는 하층민 집단 안에 계급적 동질성과 함께 강한 공동체적 유대를 가질 수 있게 하였다.
되었다. 임오군란으로 조선은 일본의 군사적 위압과 청국의 군사적 간섭뿐만 아니라 동시에 구미 열강세력까지 침투하여 심한 각축을 이루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청・일 양국의 정치・경제적인 세력의 대량침투와 주병을 허용하는 사태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점점 식민지국가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청일전쟁의 서막전이 조선에서 벌어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1882년 조선 봉건 왕조의 중심부를 뒤흔든 임오군란(壬午軍亂)은 표면상 군인 봉기이지만 여기에 서울 주변의 도시 빈민이 합세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대원군의 재집권이라고 하는 정치적 변화까지 불러일으킨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다. 단순한 일과적 사건이 아니라 개항 이후 정치・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이다. 비록 자연 발생적이고 서울에 한정된 민중 항쟁이었지만, 그것은 전개과정에서 도시 하층민들까지 합세하여 조선 봉건 사회 체제가 무너지면서 쌓여온 봉건적 모순과 개항 이후 일본과 청의 침탈로 인한 모순이 확대 심화되면서 나타난 민중의 반봉건 반침략 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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