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교양]링컨의 카리스마 리더쉽
- 최초 등록일
- 2005.10.14
- 최종 저작일
- 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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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링컨의 성격적 특성과 리더쉽에 의한 부하들에게 미친 영향력,
그리고 저의 생각을 적어 놓은 것입니다..
잘 쓰지는 못했지만 참고 되었으면 합니다..
목차
1.아브라함 링컨
2.링컨의 카리스마 리더십
1) 링컨의 성격적 특성 및 부하들에게 미치는 영향력
2) 링컨과 카리스마 리더십에 대한 나의 생각
본문내용
링컨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였기 때문에 학교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지만, 독학하여 1837년 변호사가 되어 스프링필드에서 개업하였으며, 1834~1841년 일리노이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847년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미국멕시코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인기가 떨어져 하원의원직은 1기로 끝나고 변호사 생활로 돌아갔다. 1850년대를 통하여 노예문제가 전국적인 문제로 크게 고조되자 정계로 복귀하기로 결심하고, 1856년 노예반대를 표방하여 결성된 미국 공화당에 입당하여, 그해 대통령선거전의 공화당후보 플레먼트를 응원함으로써 자신의 웅변이 알려지게 되었다.
1858년 일리노이주(州) 선출의 상원의원선거에 입후보하여 재선을 노리는 민주당의 S.A.더글러스와 치열한 논전을 전개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더글러스와의 공개논전에서 행한 “갈려서 싸운 집은 설 수가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노예, 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영구히 계속될 수는 없다고 믿는다” 는 유명한 말을 하여 더글러스의 인민주권론을 비판하였다. 선거결과에서는 패하였으나, 7회에 걸친 공개토론으로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고,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받았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것은 노예제에 대한 그의 견해가 과히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선거에서는 민주당 쪽에서 노예제 유지의 브리켄리지와 인민주권의 더글러스의 두 명의 후보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링컨이 당선되었다.
링컨의 카리스마 리더십
“다수의 동의와 공감을 끌어낼 수 있으면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면 어떤 것도 성공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공감과 동의를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법령을 제정하거나 결정사항을 발표하는 사람보다 차원높은 영향력을 지닌다.”
1) 링컨의 성격적 특성 및 부하들에게 미치는 영향력
링컨은 충고를 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링컨은 정보수집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 그가 내리는 결정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게 될 사람들과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직접 실행할 수 없을 때는 신뢰할수 있을 만한 자문관들을 보내 정보를 수집했다고 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