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화성 답사기
- 최초 등록일
- 2006.02.22
- 최종 저작일
- 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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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역사와 문화라는 수업을 들을때 제출했던 레포트로
"화성 답사기" 입니다.
아시다시피 화성은 수원에 있는 화성을 의미라며 세계문화유산입니다.
직접가서 답사했기 때문에 느낌점등이 매우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한 부족한 자료를 나름대로 구해서 편집했으므로 부족함이 없는 자료 같습니다.
많은 도움 되셨으면 합니다.
목차
서론
본론
결론
본문내용
< 본론 >
이렇다보면 화성이 만들어진 시기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된다. 화성은 과연 어떤 목적과 의의를 지니고 태어나게 된 것일까 하는 의문에 대해 알아보자.
정조는 당쟁에 휘말려 비명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효로서 정성을 다하고자 한다. 양주 배봉산 지금의 서울시립대 뒷산에 초라하게 있던 묘를 왕릉에 준하는 규모로 다시 만들게 되면서 자신이 죄인의 아들이 아니라는 점을 보이며 왕권강화를 위한 국면전환을 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160여 년 전 남인이었던 윤선도가 효종의 능침으로 지목한 곳이어서 조선 최대의 길지로 지목한 바가 있다.
당시 국제 정세는 청나라에 서양의 새로운 문물이 밀물 들듯이 유입되고 있었고 청과의 교류에서 당시의 식자층들은 이를 감지하고 있었다. 또한 서양사람들이 우리나라 연해에 표류해와 서양사정을 속속들이 알게된다. 따라서 과학문명과 서학이 유입되고 북학파, 실학파들이 등장하며 자유시장경제적 경향이 농후해 진다. 이 때 정조는 청나라의 백과전서인 [고금도서집성] 10,000여 권 중 5,000여권의 수입하여 이를 바탕으로 연구활동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정조는 스스로 지적탐구를 하여 나라안에서 가장 완전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지표를 세우고 그것을 정치적 절대권행사의 근거로 삼는 유교적 계몽절대군주의 모습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주 스스로 신유학의 최고목표인 수기치인에 충실하여 성군정치의 이념을 실현하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가 벌열 세력이 난무하던 혼란의 시대임을 감안한다면 정조대왕의 이 같은 노력은 정말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었음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누구나 하기 힘든 일을 했을 때 비로서 대단한 일이 되듯이 정조대왕 역시 위대하다고 칭송 받아 마땅하리라 사료된다.
수원을 일컬어 흔히 효원의 도시라고 부른다. 이는 지금의 수원이 탄생되는 배경에 정조의 효성이 한 몫을 단단히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나 지리적으로 볼 때 현재의 수원은 각광을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과거의 수원이 서쪽으로 치우친 곳에 자리잡아서 터가 비좁았고, 수운이 위주가 되는 시기에는 서쪽의 발달된 해안을 따라 물산과 사람의 이동이 쉬워 각광을 받았겠지만, 물자 운송의 육로 발달은 도시의 입지를 크게 바꿔 놓으므로 자연히 지방 도시의 재구성이 필요했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다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 묘원의 이장은 수원의 도시 재구성을 앞당기게 했다.
그러나 수원부의 화산은 이미 조선 중기 이후부터 효종의 왕릉 후보지로 거론되어 왔던 것이 말해주는 것처럼, 시기가 문제였을 뿐 언제고 왕릉으로 사용만 된다면 화산 아래의 읍치소와 주민들의 이전은 불가피 한 것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