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과]제1차 국공합작과 북벌
- 최초 등록일
- 2006.04.23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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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차 국공합작의 전개과 경과
목차
Ⅰ. 국민당의 개진과 소련의 중국혁명에의 접근
Ⅱ. 국민당의 개조와 국민혁명의 전개
Ⅲ. 국민정부의 성립과 왕장련합체제
Ⅳ. 북벌과 무한국민정부
본문내용
이들과 협력하고 있던 중공도 2, 3월에 들어서면서 공개적으로 장개석이 손문의 연소, 용공, 노농부조의 삼대정책을 위반했다고 공격을 가했다. 장개석에 대한 반독재제고운동의 주장이 강해지는 가운데 3월 10일 개최된 국민당 제 2계 3중전회는 장개석이 장악하고 있던 국민혁명군총사령부의 권한을 대폭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당정의 주도권을 둘러싼 정치적 명분싸움에서 정치적 우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한국민정부측과의 대립이 확연하게 드러나자 반공적 입장을 밝히 장개석은 무한국민정부와의 분열을 예고한 `4․12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었다. 한편 무한국민정부가 정권으로서의 독자적 기반을 확립하려 할 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재정적 안정이었다. 무한국민정부의 경제적 기반은 정부출범 당초부터 극히 취약한 상태였다. 국민정부가 모색한 재정난 타개책의 하나는 거액의 공채를 발행하거나 지폐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환과 태환도 보장되지 않은 공채․지폐의 발행은 무한의 상업과 금융에 심각한 타격을 줄뿐이었다. 그리하여 무한국민정부는 재정장악에 큰 비중을 두고 강절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하게 되었다. 강절지역에의 군사적 진출을 먼저 시도하고 있던 것은 장개석이었다. 이에 대해 무한국민정부측은 열강과의 충돌을 고려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개석의 동남작전이 결정되자 무한정무는 3중전회를 통하여 장개석의 군사적 정치적 권한을 대폭 약화시켜 열강․군벌과의 타협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한편 정부 지배의 전 영역에 대한 외교․재정․교통 등의 통일을 우선적 정책목표로 제시하였다. 무한국민정부의 강절장악을 위한 여러 노력은 장개석의 `4․12 쿠데타`로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장개석은 군에의 반장공작을 봉쇄하는 등 무한국민정부측의 강절장악노력을 무산시켜 갔다. 4․12쿠데타에 이어 각지에서 무한국민정부의 관할권으로부터 이탈하고 4․15쿠데타로 광동과 국민정부의 재정관계가 완전히 단절됨으로써 무한국민정부는 정권의 계속적인 유지를 위한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현금집중정책을 시행하자 상해의 금융계는 무한과의 모든 경제관계를 단절하고 전국의 동업자에게 동조를 요청하였다. 이 정책은 이러한 결과로 오히려 국민정부에 재정․금융상 치명타를 가했다. 한편 북벌진전과정에서 급속히 발전해 간 호남․호북의 대중운동은 무한국민정부의 성립으로 한층 급진화되어 가고 있었다. 노동운동은 임금인상, 경영에의 참가 등을 내걸고 파업을 계속해와 업계는 이로 인해 경제적 침체상태에 빠져 있었다. 무한국민정부는 이러한 대중운동의 고양속에서 1927년 2월 한구와 구강의 영국조계를 회수함으로써 반제적 대중운동의 기반 위에 정부의 정치적 입장이 크게 강화되었지만 공산당이 주도한 급진적인 노동운동의 전개는 무한국민정부의 재정적․경제적 기반을 크게 약화시켜는 작용을 하고 있었다. 이에 무한국민정부가 대중운동의 급진화를 제어하는 방향으로 당방침을 발표한 직후인 5월 호남에서의 농민운동의 `과화`에 대응한 허극상군의 반공거사 즉 마일사변이 일어났다. 이들은 당생지군 직속의 군인들로서 농민운동의 급진화가 지주적 기반을 가진 이들을 반공행동으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공산당 주도의 대중운동의 급진화속에서 군인들의 압력이 급증하면서 무한에서의 분공이 예상되는 가운데 토지 국유화의 시행, 공산당원 2만명, 노농 5만명의 무장,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의 개조를 지시한 코민테른의 전문이 구실이 되어 7월 13일 공산당은 국민정부를 퇴출하였고 7월 15일에는 국민당도 공식으로 분공을 결의하였다. 이로써 제1차 국공합작은 붕괴한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