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신해혁명
- 최초 등록일
- 2006.05.25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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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해혁명(민국혁명)의 전개과정과 의의
목차
들어가면서
1, 혁명의 갈림길에서
2. 개벽의 날
1)신군의 동요와 봉기
2)혁명의 전국적 파급
3)원세개의 등장
3. 좌절된 꿈
1)왕조의 몰락
2)반혁명의 길
4. 혁명의 성과와 의의
본문내용
들어가면서..
중국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동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건립한 혁명, 이를 흔히 신해혁명이라 이야기한다. 혁명봉기가 일어난 해인 1911년이 간지(干支)로 신해년이어서 신해혁명이라 불리고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민국혁명이 더 타당하다. 1913년의 원세개 토벌전쟁을 제2혁명, 1915․16년의 반제제 투쟁을 제3혁명으로 지칭하면서 신해혁명을 미완의 혁명인 제1혁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한 우창[武昌]에서 최초로 신해혁명의 봉기가 일어난 10월 10일을 쌍십절(雙十節)이라 하여 타이완에서는 중요한 경축일로 지키고 있다. 이처럼 수 천년간 이어져오던 전제왕권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공화정이 수립된 배경과 혁명의 전개과정, 그것이 미치는 성과와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Ⅰ. 혁명의 갈림길에서
1. 싹트는 혁명의 불씨
19세기 말엽의 중국의 선진적 지식인들로 하여금 자국의 국가적 위기를 전에 없이 절실하게 느끼게 한 것은 청일전쟁에서의 패배였다. 청일전쟁 자체가 중국의 조선에 대한 옛부터의 종주권을ꡐ근대적‘평등조약체제로 보완해 보려는 소제국주의적 시도였는데, 그것에 실패함으로써, 중국 자체가 제국주의적 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어렵게 되었다는 좌절감, 위기감이 그들 선진 지식인들을 강타하였던 것이다. 전쟁에서 진 상대가 총알만한 소국이라고 우습게 알아왔던 일본이었기에 그 위기감은 더 뚜렷하게 인식되었다. 청일전쟁에 패함으로써 소제국주의로의 길이 막힌 것만이 아니라 열강에게 중국 땅이 분할 점유 당함으로써, 중국이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아주 멸망해 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려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00년이 갈림길이 되어 청 왕조의 존재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까지의 혁명운동은 참여 인원의 동원대상이 투기적인 비밀결사 성원을 주로 한 극히 제한적인 것이었으나 1901년부터는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론적으로 청조를 타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한 예로 1902년 8월에 상해의 남양공학의 학생들이 조직한 황설부(黃說部)에서는 ꡐ공화야말로 하늘의 뜻에 따른 것이고 공화는 도(道)이다ꡑ라고 하는 황제체제를 부인하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