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성례전-김순환
- 최초 등록일
- 2006.09.12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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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6세기부터 종교개혁까지 의 성례전
목차
3) 6세기부터 종교개혁까지
(1) 8세기말까지
(2) 샤를메인부터 종교개혁까지
4) 개혁자들의 세례에 대한 입장
(1) 16세기 개혁자들이 중세의 세례에 대해 비판한점들
(2) 개혁자들이 유아세례를 지지한 이유
(3) 개혁자들의 세례예식
(4) 개혁자들의 사적세례(Private Baptism)과 견진에 대한 입장
(5) 급진적 개혁들
5) 종교개혁이후 세례(The Modern Period)
(1) 세례의 양식(The Mode of Baptism)
(2) 세례의 시기와 장소
(3) 입교의 과정
본문내용
3) 6세기부터 종교개혁까지
(1) 8세기말까지
유아에게 교육은 어려운 것이어서 대신 복음전수(복음서를 읽어 주는 것)로 대치하였다. 세례 중에 후보자에게 던져졌던 신앙에 관한 질문들은 이제 부모와 대부모에게 주어졌다. 사제에 의해서 말해지던 형식문인 ‘내가 아무개에게 성부와...성자와...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라는 표현은 8세기 로마에서 그 증거가 나타나고 있다. 8세기경에 이르러서는 세례 전 집회가 두 차례 있었다. 첫 번째는 유아가 세례 후보자가 되는 등록과 소금수여를 위한 집회이고 두 번째는 네 복음서의 첫 구절만 읽어주는 것으로 이루어진 ‘복음전수’였다. 이 둘의 어떤 것도 후보자의 대답을 요하는 것은 없었다.
6세기부터 이후 2세기 동안 입교식은 특정 대축일에 엄숙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고올이나 영국 등에 비해 교구가 작고 감독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중부 이탈리아 등에서는 부활절전야나 성령강림절 전야에 시행토록 엄격히 제한하였다. 6세기부터 성인세례는 드문 것이었고 유아세례가 일반화되었다. 세례예비자과정(catechumenate)은 보존이 되었고 정교하게 되었지만 주로 유아들을 위한 것이었고 성인들을 위한 세례예비자과정은 매우 약화되었다. 유아들의 세례는 수동적인 형식이 지배적이었다.
로마에서는 사순절 후반에 유아들이 처음에는 주일날 모이다가 나중에는 평일에 모여서 정밀조사를 받았다. 세 차례에 걸쳐서 행하던 정밀검증도 후에는 7회로 늘어났다. 더 이상 후보자의 개인적 신앙이나 도덕성 등을 묻는 일이 없이 정밀검증은 악귀가 그들에게서 떠나도록 하고자 한 것으로 기도와 축귀로 이루어져 있었다. 세례후보자로 등록하고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순서가 첫 정밀검증과 결합이 되어 기도, 십자가 긋기, 그리고 유아의 입에 소금(축귀를 마친)을 넣는 일 등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때 사용하는 형식문은 ‘아무개는 영생까지 화해의 징표인 지혜의 소금을 받으라’이었다. 이 기간에 신조와 주기도가 유아에게 낭송되었다. 유아들이 배울 수 있게 한다는 이론에 기초한 것이다. 성토요일에는 에바다가 시행되었다. 악귀를 거부하면서 코와 귀에 침을 바르고 가슴과 등에는 기름을 바르는 의식이었다. 마지막으로 유아를 위한 신조가 낭송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