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
- 최초 등록일
- 2006.11.03
- 최종 저작일
-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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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로댕과사진
목차
1로댕의생애
2로댕의작품세계
3로댕의작품
도판
본문내용
1. 로 댕 (1840-1917)
1) 로댕의 생애
오귀스트 로댕은 1840년 11월 14일 아르발레트가에서 태어났다. 로댕의 누나인 안나 마리는 로댕의 예술적 자질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로댕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로댕은 어렸을때부터 자연을 사랑하며 모든 것을 그림을 통해 그의 재능을 표현하려 하였다. 그의 나이 14때부터 그의 아버지는 직업을 위해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파리의 국립 공예 미술학교인 프리뜨에꼴(Petit Ecole 18세기 전의 전통적인 교육방법을 지닌 학교로 옛날 자료 드라페리로 알려진 학교다. 특히 삶의 관찰과 시각적인 기억력의 발달에 그 교육의 기초를 두고 학생들의 고유감수성을 소중히 여겼다. 많은 학생들이 장식미술가로서 훈련을 쌓으면서도 이 학교를 후에 에콜 데 보자르(미술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생각했다.
에 입학시켰다. 로댕은 어느날 프리뜨 에꼴을 돌아보던 중 우연히 한 교실에서 점토 작업을 하는 광경을 봤는데, 그것은 조각가가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적 기질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점토를 보았다. 하늘로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팔, 머리, 다리, 각부분을 따로따로 만들어 보았다. 그리고는 전체 형상의 제작에 덤벼들었다. 모든 것이 일거에 이해되었고, 지금처럼 능숙하게 해냈다. 나는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베르나르 샹피뇔르, <로댕>, 시공사, p12
그는 수업이 끝나는데로 루브르로 들어서 드로잉에 전념했다. 고대와 현대 조각앞에서는 발길을 떼지 못했고, 특히 부샤르동, 우동, 클리디옹의 작품에 집중했다. 그 후 로댕은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 에꼴 데 보자르에 들어가기 위해 응시했으나 세 번이나 낙방하였다. 로댕은 낙방에 굴하지 않고, 그로 하여금 관학에 대한 반발심을 일으키게 하였고, 형식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게 된 첫걸음이 되었다.
그는 기본 생계를 해결해야 했으므로 장식업자와 공공사업 계약자를 위해 일하고, 주문에 따라 조각가의 조수나 주조공으로도 활동했다. 이 시기에 로댕의 삶에 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한동안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엄격한 집안환경에서 그의 초년시절을 지탱시켜준 것은 누이 마리아의 따뜻한 보살핌이었는데, 누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생-자크 사제의 수사로 들어간다. 그곳의 배려로 정원 한구석에 작은 작업실을 얻고 조각을 했다. 에이밀 신부가 그의 천직을 알아보고 스스로의 모델이 되어 주어 흉상을 만들게 되는데 이 작품이 로댕의 사인이 된 첫 작품이다.
참고 자료
베르나르 샹피뇔르, <로댕>, 시공사, p12
최승규, <서양미술사100장면>, 한명출판, p352
박숙영, <로댕, 그의 모더니티>, 창조문화, p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