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개혁의 해방전후사 인식과 재인식
- 최초 등록일
- 2006.12.10
- 최종 저작일
-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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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농지개혁에 대한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비교
목차
I. 머리말
II. 해방전후사의 인식
1. 농지개혁 이전의 농업의 상황
2. 농지개혁의 요망
3. 북한의 토지개혁
4. 농지개혁에 대한 지주들의 거부반응
5. 남한의 농지개혁
6. 남한의 농지개혁의 평가
III.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 농지개혁과 한국의 현대사
2. 이승만에 대한 오해
3. 한국전쟁 전의 농지개혁
4. 민국당의 5·30 선거 패배
5. 농지개혁에 대한 평가
IV. 맺음말
본문내용
I. 머리말
먼저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1945~1953년을 다루었으며, 운동사·이념사를 강조하였으며, 역사 진행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1930~1950년대를 다루었으며 일상사·비교사를 강조하였고 역사적 선택의 결과에 초점을 맞추었다. 여기에서는 농지개혁에 대하여 “해방전후사의 인식-해방전후사의 재인식” 두 가지 관점에서 비교를 해가며 알아보겠다.
II. 해방전후사의 인식
1. 농지개혁 이전의 농업의 상황
우리나라의 농민은 오래 역사적 과정에 걸쳐 너무나 가난하게 살아왔다. 가령 조선조 500년간의 봉건 사회만 보더라도 “농민은 최고 지주인 국가의 농노로서 그리고 적지 않은 부분이 사적(私的) 지주의 예농으로 일층 가혹한 생활 조건하에 긴박(緊縛)되어” 있었으며 오랜 중세 사회를 통하여 농업 생산력의 발전은 거의 인정할 수 없는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봉건적 토지 소유 제도의 결과였다. 또한 가혹한 부역 노동, 그리고 생존을 위협하는 경제 외적 강제에 의한 공물 및 조세로서의 수탈로 말미암아 생산력은 정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인구의 증가도 거의 정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농민은 이러한 처참한 생존의 연속과는 달리 지배 계급은 구중궁궐에 묻혀 향락의 연속사를 점철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봉건사요, 세계의 봉건사인 것이다. 그리고 지배 계급은 향락권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하여 한층 더 가혹한 수탈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은 프랑스의 루이조(朝)가 그러했고, 러시아의 차르조가 그러했으며, 또한 우리나라의 조선조가 그러했다. 가령 구한말에 정부가 토지 제도의 개혁을 시도한 바 있지만, 그것은 봉건적 압박에 의하여 정체된 농업의 생산력을 개방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지배 체제를 유지하고 보강하기 위한 세제(稅制)의 근대적인 수립을 단행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자본주의적 발전을 개시함과 동시에 제국주의화한 일본에 의하여 식민지로서 강제 인수되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이 땅에 대한 인수식도 채 마련하기 전에 식민지 착취의 기초 공작 과정으로서 토지 조사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토대로 하여 조세 제도도 근대화하였다. 이와 같이 토지 조사 사업은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착취하기 위하여 선행시켜야만 될 필요조건이었으며 이 나라의 농민 생활고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데 그 목적을 두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토지 조사 사업의 결과는 구래의 수조권자가 그대로 토지 소유권자가 되었으며 종래의 실질적 토지 점유자이며 또한 경작자였던 대부분의 농민은 토지의 점유권을 상실하고 지주와 경작에 대한 계약을 맺는 소작 농민으로 전신되었다. 이와 같은 일본 제국주의는 이 당에 봉건적 착취 제도를 강화함으로써 보다 급속하게 제국주의적 발전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는 스스로 지주화하여 이 땅의 토착 지주와 뜻을 같이하는 농업 개혁을 단행하였다.
참고 자료
해방전후사 인식
해방전후사 재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