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욱달부의 침륜
- 최초 등록일
- 2007.04.21
- 최종 저작일
- 20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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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다음해 중화민국이 정식으로 수립되자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문학을 개혁하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신문학혁명을 주장한 첫 번째 주자는 후스였다. 그는 1917년 1월 〈신청년〉이란 잡지에 〈문학개량추의〉를 발표하여 구문학의 병폐를 지적한 이른바 팔불주의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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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다음해 중화민국이 정식으로 수립되자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문학을 개혁하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신문학혁명을 주장한 첫 번째 주자는 후스였다. 그는 1917년 1월 〈신청년〉이란 잡지에 〈문학개량추의〉를 발표하여 구문학의 병폐를 지적한 이른바 팔불주의를 주장했다. 다음 달 천두슈는 〈신청년〉 2월호에 〈문학혁명론〉을 발표하여 후스의 주장을 발전시켰다. 1918년 7월 후스는 다시 〈건설적 문학혁명론〉을 발표하여 `국어의 문학, 문학의 국어`를 주장하고 신문학운동의 요지와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이러한 신문학운동은 1919년 5월 4일에 일어난 5·4운동의 영향으로 급속히 전파되어 폭넓은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5·4운동은 정치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굴욕적인 외교에 대한 항의가 발단이 된 학생운동이었으나, 그 정신적인 배경은 문학혁명을 포함한 신문화운동이었다. 1920년대 초기에는 뜻을 같이 하는 작가들이 모여 문학단체를 결성했는데, 그중 문학연구회와 창조사가 대표적이다. 문학연구회는 저우쭤런·마오둔 등이 발기하여 `인생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고 사실주의적 문학을 제창했다. 창조사는 궈모뤄·위다푸 등이 발기하여 초기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고 낭만주의적 문학을 제창했으나, 후기에는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인 궈모뤄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문학의 계급성을 논한 `혁명문학`을 주장했다. 이로써 창조사는 중국 최초로 마르크스 문학이론을 수용한 문학단체가 되었다. 이 시기는 사실상 이 두 문학단체에 의해 주도되었다.
욱달부는 ‘창조사’의 대표주자격인 소설가로 자아와 개성의 해방을 부르짖는 소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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