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의 승리 원인
- 최초 등록일
- 2007.09.18
- 최종 저작일
- 2006.09
- 8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국민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력이 약했던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을 대만으로 내 쫓을수 있었던 원인을 파헤치는 논문형식의 글이다.
목차
Ⅰ. 서 론
Ⅱ. 항일전쟁 시기의 국민당과 공산당
1. 항일전쟁을 위한 국공합작
2. 항일전쟁 속에서 공산당의 세력 확장
3. 일본투항 후 국공내전의 전개
Ⅲ. 공산당이 승리한 원인
1. 공산당의 토지개혁
2. 동북지역 내전에서 공산당의 유리한 조건
3. 중국에서 미국정부의 손떼기 정책
4. 모택동의 군사전략
5. 국민당의 극단적인 부패
(1) 군사적 측면
(2) 정치적 측면
(3) 경제적 측면
Ⅳ. 결 론
본문내용
Ⅰ. 서 론
1921년 7월 1일 상해에서 성립한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력이 약했다. 이로 인해 공산당은 국민당에게 여러 번의 무차별 학살을 저항도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고, 중공의 세력은 점차 줄어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8년 간의 항일전쟁을 거치면서 공산당의 세력은 128만 군대, 7%의 토지, 20%의 인구를 형성함으로써 급속도로 향상되어갔다. 하지만 국민당의 430만 군대, 93%의 토지, 80%의 인구와 비교해 본다면 공산당이 엄청나게 불리한 현실이었다. 따라서 국민당은 이와 같은 압도적인 세력을 통해서 중공을 격파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그것에 의하여 건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반대였다. 공산당이 그 막강했던 국민당의 세력을 대만으로 쫓아내고 승리한 것이다.
그렇다면 모택동의 공산당은 항일전쟁 시기부터 어떤 정책으로 어떻게 세력을 확장 하였기에 그 막강했던 국민당을 내쫓고 승리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장개석의 정권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자세히 알아보면서 국민당이 왜 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항일전쟁 시기의 국민당과 공산당
1. 항일전쟁을 위한 국공합작
1937년 7월 7일 밤, 노구교에서의 일본군과 중국군의 포격사건으로 선전포고 없이 중일전쟁의 전면화가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빠른 속도로 중국의 영토를 점령해 나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산당은 ‘이 수년 내에 우리 국가 우리 민족은 이미 위기일발의 생사 갈림길에 놓여 있다. 항일하면 살고 항일하지 않으면 죽는다. 항일 구국은 지금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성한 천직인 것이다’라는 상황인식 하에 ‘망국노예로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모든 동포’에 대해 ‘돈이 있는 자는 돈을, 총이 있는 자는 총을, 식량이 있는 자는 식량’을 내고 ‘전문적 기능이 있는 자는 전문적 기능을 바칠’ 것과 ‘국토방위를 위해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흘리자’며 호소하였다. 즉 국공내전을 정지하고 국방정부와 항일 연합군의 결성을 처음으로 호소하여 정책전환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참고 자료
■ 김정계 외 1, 『모택동의 군사전략』, 중문출판사, 1994. 8
■ 로이드 E.이스트만,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주)지식산업사, 1989. 4
■ 신성곤 외 1,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 오쿠무라사토시, 『새롭게 쓴 중국 현대사』, 조합공동체 소나무, 2002. 4
■ 조너선 D.스펜스, 『현대 중국을 찾아서2』, 이산, 1998
■ 姬田光義 외 1, 『중국근현대사』, 일월서각, 199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