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사회변화에 따른 문예활동 양상
- 최초 등록일
- 2007.09.23
- 최종 저작일
- 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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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후기 영,정조대의 사회변화에 따른 문예활동 발달 양상에 대해 쓴 보고문입니다.
목차
조선 후기 사회 변화에 따른 문예 활동 양상
영,정조대에 활동한 조선 화가 (김홍도, 김득신, 심서정)
본문내용
조선 후기 사회 변화에 따른 문예 활동 양상
어머니가 무수리였던 영조는 경종을 이어 즉위하기 직전까지 평민과 같은 삶을 보냈으므로 백성들의 생활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균역법 실시, 신문고 제도 부활 등 여러 가지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꾀했으며, 안으로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붕당의 씨앗을 뿌리 뽑고자 하였다.
조선의 계몽 군주로 평가받는 정조는 영조에 이어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을 하고자 노력한다. 즉위하자마자 임금의 정책 자문 기관이라 할 수 있는 규장각을 설치하였고, 초계 문신 제도를 실시하여 재능 있는 신하들이 일정 기간 동한 규장각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규장각 설치를 통해 정조는 정책 자문뿐만 아니라 개혁성을 띤 신하들을 등용함으로써 자신의 정치 기반을 닦아 나갈 수 있었다.
정조는 능행을 자주 하였는데, 이 때마다 격쟁을 허용하였다. 격쟁이란 일반 백성이 임금의 행렬 앞에서 쇠붙이 등으로 소리를 내어 임금에게 직접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인데, 정조는 이를 통해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막고자 하였다. 능행을 할 때마다 수십 건의 격쟁을 접수하였고, 격쟁을 다른 일보다 우선 처리하도록 하였다. <일성록>에는 160건이 넘는 격쟁 기록이 남아 있다.
이미 신분제가 동요하고 있던 때에 정조는 노비제를 혁파하려고까지 했으나, 기득권 층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노비 추쇄관 제도(도망 노비를 잡아들이는 제도)가 폐지되었고, 정조 사후에 공노비가 혁파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