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 조선의 무역사례 중 모자수입 무역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8.04.13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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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8세기 후반 조선의 무역물품중 중요한 비중을 지녔던 모자수입 무역에 대한 글입니다
목차
1. 모자무역의 전개
2. 역관의 관모무역
3. 사상의 세모무역
요약...
본문내용
조선의 중개무역 구조는 1720년대 동아시아의 전반적인 변화를 맞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1684년 청이 전통적인 해금정책을 해제한 이래, 일본의 나가사끼에 1685년 중국 복주·하문의 상선이 왕래하기 시작했고, 1689년에는 청나라의 상관이 설치되었다. 이후 점차 청·일간의 직교역이 성행하여 종래 왜관무역을 통해 청나라의 물화를 구입해 일본에 전매해 왔던 중개상인들의 수가 점점 감소했고 동시에 왜관무역도 쇠퇴하였다. 이런 직교역 외에도 1660년대 이후 일본내에서 은·동의 산출이 현저하게 줄어들기도 하였고, 왜관의 백사무역의 쇠퇴가 1710년대부터 일본의 생사 직접생산과 중국의 생사 수출제한, 생사 가격의 등귀 및 유럽 상선과의 생사 무역경쟁이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 조선 내 자연 삼의 절종 현상 또한 왜관 무역이 쇠퇴하게 된 이유들 중 하나로 꼽힌다.
왜관무역이 쇠퇴하면서 왜은의 유입이 크게 줄어 조선정부의 재정에 타격을 안겨주었다. 이런 이유로 부연역관에게 우역자금으로 대출하던 관은 공급이 끊겼고 역관들의 사행무역에서 손해를 보는 일이 많아졌다. 바로 이 상황에서 조선정부의 조치가 바로 모자무역이었다. 이 모자무역은 공용은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이 컸는데, 18세기 사상의 성장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이렇게 18세기 후반기의 무역은 자연히 사상이 주도하게 되었으며, 그 양상을 모자수입무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모자는 중국의 관동물화關東物貨로써 처음에는 역관이 중심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사상이 중심이 되어 수입한 방한용 물품이었다. 관모무역은 역관무역의 침체로 사행 경비인 공용은 조차 마련키 어려워지자, 정부가 역관에게 관은을 출급하여, 그 돈의 일부는 공용은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돈으로는 모자를 사들여와 이익을 얻도록 한 제도이다.
참고 자료
<조선후기 중국과의 무역사> 유승주·이철성 지음. 경인문화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