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 공의회
- 최초 등록일
- 2008.06.29
- 최종 저작일
- 20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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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325년 니케아 공의회 부터 1962년 제2차바티칸 공의회까지 내용을
보기좋게 정리했습니다. 좋은 자료입니다. ^^
목차
(1)니케아 공의회(325년)
(2)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3) 에베소 공의회(431년)
(4) 칼케돈 공의회(451년)
(5)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년)
(6)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년)
(7)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년)
(8)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869년)
(9) 제1차 라테란 공의회(1123년)
(10)제2차 라테란 공의회(1139년)
(11) 제3차 라테란 공의회(1179년)
(12)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
(13) 제1차 리용 공의회(1245년)
(14) 제2차 리용 공의회(1274년)
(15) 비엔나 공의회(1311년)
(16) 콘스탄츠 공의회(1414년)
(17) 페라라-피렌체 공의회(1439년)
(18)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17년)
(19) 트렌트공의회(1545년)
(20)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년)
(21)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
본문내용
(7)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년)
2세기경의 십자가에는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당나귀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4세기에 이르러 오늘날의 십자가 형태가 나왔다. 그리고 5세기에 성화상(주로 그리스도와 성인의 성화상)의 공경이 시작되고 6세기 말에 전파되어 7세기 비잔틴 교회에 있어서는 대중 신심으로 크게 유행되었다.
그런데 후시대에 이르서 소아시아에서 성화상 공경에 대한 반대가 일어났다. 그것은 일반 대중이 모상과 그것이 뜻하는 대상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신심 행위가 우상 숭배에 떨어질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육화한 그리스도의 모상은 그 신성과 인성을 내포해야 하는데, 신성은 나타낼 수 없었고 또 인간 모습만의 표현은 네스토리우스 사상과 같은 이단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동로마 제국에 있던 단성론의 이단자들들도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참된 인성을 부인하였기 때문에 성화상 공경을 배격하였다. 아울러 동방 교회의 주교들은, 이슬람교도의 아랍인들이 시리아와 이집트에 침입하면서 성화상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어서 이들의 개종에 이 신심 행위가 장대가 된다고 생각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성화상 공경에 찬의를 공표하였다. 또한 8세기 초에 신학자인 다마소의 요한은 성화상은 ‘침묵의 설교’, ‘하나님 신비에 대한 기록’, ‘문맹자들을 위한 책’일 뿐 아니라 성화한 물질이 표상은 그리스도의 육화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다고 신학적 설명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육화 신학과 성화상의 의미를 의결시켰고 신에게만 바치는 흠숭과 피조물에게 드리는 공경을 구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상 논쟁은 수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725년에 황제 레오 3세가 비잔틴 제국에서 성화상의 파괴를 명령함으로 해서 이 논쟁은 공개화되었다. 일반 대중은 수도자들의 영향으로 성화상 공경을 주장하고 실천하였다. 마침내 730년에 황제는 성화상 공경 금지의 칙서를 반포하여 성당에서 성화상의 강제 철거를 명령하였고 성인들의 유해는 파괴 또는 소각되었다. 콘스탄틴 5세의 시대에 성화상 파괴는 극에 달하였다. 이 황제는 754년에 콘스탄티노플의 한 교회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338명의 참석 주교들의 만장일치로 성화상 공경을 우상 숭배로 결의하여 금지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성화상 공경을 주장하는 지도자들 특히 다마소의 요한을 이단으로 단죄하여 처형하였다. 따라서 이는 반수도원 운동으로 서술되고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