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 운동
- 최초 등록일
- 2008.09.23
- 최종 저작일
- 20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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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운동의 발아에 대한 기술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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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식민통치는 350년이나 지속되었다. 이렇게 긴 시간동안 식민통치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민족주의 운동이 20세기에 들어서나 뒤늦게 발아한 영향이 크다. 네덜란드의 식민통치 방법이 윤리정책으로 바뀌면서 쁘리야이 끄찔이라는 신계급이 생겨났다. 이들을 중심으로 민족주의는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20세기 초반의 약 30년 동안, 쁘리야이 끄찔을 바탕으로 인도네시아인들은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또 종교적으로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서 해결하여 새로운 시대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생각들을 막연하지만 폭넓게 가지고 있었다. 1908년 5월에는 쁘리야이 끄찔 학생 조직이 결성되고, 이들에 의한 회합에 의해서 부디 우또모가 탄생하였다. 부디 우또모는 ‘탁월한 지성과 성격 또는 문화’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1908년까지 일반인을 포함하여 650명의 회원을 가진 조직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일반인들도 가입하게 되자 학생들은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부디 우또모는 자바 지역에 중심을 두면서 자바인들의 문화적 우월감을 노골적으로 들어낸다. 이들은 하층 계급과 괴리되면서 대중적 기반을 갖지 못하게 된다. 근본적으로 문화적, 교육적 관심사에 한정된 기구였던 부디 우또모는 일반 대중들의 기대와는 달리 정치적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리고 조직의 출범부터 자금과 지도력의 부족으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침체일로를 걷게 된다. 하지만 그 뒤 더욱 활동적이고 중요한 조직이 잇따라 구성되었다. 종교, 문화, 교육, 정치 등의 성격을 가진 이런 조직들은 대체로 사회 하층 계급에서 움직이면서 엘리트와 민중 사이의 교량역할을 행한다.
20세기 초에 도시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상업 활동이 중국인들의 경쟁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끼고 중국인들에게 맞서 경쟁하는 인도네시아인 무슬림 상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무슬림연합(SI)이 만들었다. SI는 점차 이슬람적 요소와 상업적 색깔 사이에서 조직의 성격이 모호해 졌고, 인도네시아인 회원은 이슬람교도인 반면에 중국인과 네덜란드인은 비이슬람 교도라는 일반적 인식을 반영하는데 지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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