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5월투쟁의 키워드 - 죽음과 폭력
- 최초 등록일
- 2008.11.24
- 최종 저작일
- 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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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91년 5월투쟁을 죽음과 폭력이라는 키워드로 작성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죽음과 폭력 - 1991년 5월의 기억
1. 91년 5월 투쟁의 발발, 전개, 소멸
(1) 발발 : 4월 26일 ~ 5월 4일
(2) 전개 : 5월 4일 ~ 5월 18일
(3) 소멸 : 5월 18일 ~ 6월 20일
① 유서대필 사건
② 한국 외국어 대학교 사건
2. 대중과 폭력
(1) 대중의 양면성
(2) 희생양의 메커니즘
3. 마치며
4. 참고자료
(1) 학생들의 유서
(2) 김지하의 「조선일보」 기고문 1991년 5월 5일 3면
(3) 6월 4일자 각 신문의 태도
5. 참고문헌
본문내용
동시에 죽음과 폭력은 그 자체로 갈등적 쟁점이었다. 5월투쟁이 지속되는 60여일 동안 각종 사회정치세력들과 지식인, 언론, 지배층은 죽음과 폭력에 상반되는 해석과 대립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갈등과 대립 속에서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했다. 그러나 ‘유서대필 사건’과 ‘외대 사건’을 경과하면서 그 의미는 급속하게 고정되었다. 하지만 그 의미계열은 5월투쟁 초기와는 전혀 상이했다. 투쟁 초기에 죽음과 폭력이 노태우 정권의 폭력성으로 계열화되어 갔다면, 이제 죽음과 폭력은 사회운동세력의 폭력성과 反도덕성으로 계열화되어졌다. 그후 더 이상 죽음과 분신은 대중을 호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5월투쟁을 촉발시켰지만, 또한 5월투쟁을 소멸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억압적 국가장치들과 이데올로기적 권력장치들의 결합된 효과였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당시 대중은 지배세력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을 받아들였거나 적어도 묵인했기 때문이다. 지배세력은 위협받던 기존의 권력질서를 재건하기 위해 유서대팔 사건과 외대 사건을 생산하여 희생양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91년 5월투쟁의 대중은 희생양의 집단효과에 암묵적으로 동조하였다.
4. 참고자료
(1) 학생들의 유서
참고 자료
대중과 폭력 1991년 5월의 기억, 김정한, 이후
‘6.3 외대사건’에 대한 언론의 ‘상징폭력화’ 과정, 이유경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매체홍보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