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의 생애와 작품세계, 사상
- 최초 등록일
- 2008.12.03
- 최종 저작일
- 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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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의 생애와 그의 작품세계, 사상에 대한 리포트입니다.
그의 사상 부분 중, 국어가치의 인식과 문학감동론으로 나누어 분석하였고, 작품속에 드러난 그의 사상과 특히 구운몽 작품을 분석하여 작품속에 용해된 작가 자신의 사고를 파악하였습니다.1 생애
김만중(1637~14692)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숙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그는 광산김씨 김익겸이 인조 15년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 당할 때 순절한 사람함으로 인해 유복자로 태어나, 1665년(현종 6) 정시문과에 장원, 정언·지평·수찬·교리를 거쳐 1671년(현종 12)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삼남의 진정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만중이 벼슬을 하던 17세기 후반은 나라 전체적으로는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나 당파 싸움은 더욱 치열해진 시기였다.
목차
1. 생애
2. 사상
1) 국어가치의 인식
2) 문학 감동론
3) 작품 속 사상
본문내용
1 생애
김만중(1637~14692)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숙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그는 광산김씨 김익겸이 인조 15년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 당할 때 순절한 사람함으로 인해 유복자로 태어나, 1665년(현종 6) 정시문과에 장원, 정언·지평·수찬·교리를 거쳐 1671년(현종 12)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삼남의 진정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만중이 벼슬을 하던 17세기 후반은 나라 전체적으로는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나 당파 싸움은 더욱 치열해진 시기였다. 그 때는 당파싸움에서 지면 귀양을 가거나 벼슬자리에서 쫓겨나고, 심하면 죽임을 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시절이었으므로 김만중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듬해 겸문학·헌납을 역임하고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1674년 인선왕후가 작고하여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그 후 다시 등용되어 1679년(숙종 5) 예조참의, 1683년(숙종 9)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조지겸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대제학, 이듬해 지경연사로 있으면서 김수항이 아들의 관하여 상소했다가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 그의 대표작 <구운몽>이 유배 시 창작하기도 하였다.
김만중은 성품이 온화하고, 효도와 우애가 투터우며, 직언을 잘하는 인물이었다. 또한 뛰어난 학식과 글 솜씨로 병조판서까지 올랐지만 윤씨부인은 검소하게 살면서 허영을 부리지 않았다. 김만중은 효심이 깊어 공사를 돌보는 시간 이외에는 늘 어머니 옆에서 어머니가 좋아하는 옛 글들을 모아 읽어드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다. 김만중이 53세가 되던 숙종 15년 숙종이 후궁 장희빈에게 빠져 정사를 그르치는 것에 대해 직간한 것 이 죄가 되어 화를 입고 남해 외딴 섬으로 귀양을 가 위리안치를 당하였다. 나랏일에 충성을 다했으며 불의 에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는 성미였기 때문에 이런 화를 당한 것인데, 아버지와 어머니의 끗꿋한 정신을 이어받은 대가인 셈이다.
효심이 지극했던 김만중은 오랜 귀양 생활로 인하여, 혼자 쓸쓸히 계실 어머니를 위하여 <구운몽>을 지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윤씨 행장기>를 지어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달랬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