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의 수립과 분기
- 최초 등록일
- 2009.10.06
- 최종 저작일
- 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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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승만 정권의 수립과 분기
목차
한국 정치의 이해
이승만 정권의 수립과 분기 (정권의 성격을 중심으로....)
1) 이승만정권기의 정치
2) 이승만정권의 권력기반
① 이데올로기 - 반공과 반일
② 경찰. 군부, 청년단체
③ 자유당
3) 이승만 정권의 성격
4) 1950년대 미국의 경제원조
(1) 1950년대 미국의 동북아 전략
(2)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한 미군
(3) 미국의 대한경제원조
본문내용
이승만은 미국에서 귀국 이후 다른 어떤 민족지도자보다도 가장 두터운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수완으로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였다.그러나 `나밖에 없다`는 오만과 카리스마적 권위의식을 가지고, 끝없는 정권욕과 독재성을 조장시킨 결과 자신의 종신집권과 독재권 강화를 위해 온갖 정치파동과 정치적 비리도 감행함으로써 점차 국민의 지지를 상실해갔다. 또한 6 ·25전쟁 발발 직후 국군이 공산군을 무찌르며 북진하고 있다고 방송하면서 자신과 정부는 열차로 피신함으로써 국민을 배신하였고 또한 `국민방위군사건`으로 많은 청년들을 희생시켰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의 집권을 위해 일대 정치파동을 일으켜 국민의 원성을 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종신집권을 노린 대통령 이승만의 지나친 정권욕과 독재성 및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의 부패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평불만이 누적된 것이 이승만 정권의 종말을 고하게 하였으며, 이승만 정부과 정치의 성격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승만정권기의 정치
* 이승만정권은 성립과정에서 좌익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독립당과 같은 민족해방운동 우익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다만 국내 지주세력을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과 친일세력 등을 기반으로 삼았을 뿐. 그러나 곧 한민당의 지지도 잃고 그 세력기반은 더욱 약화되었다.
6.25 전쟁중에 거창양민 학살사건 등과, 1백만명의 제2국민병을 굶주림과 질병으로 몰아넣고 그 간부들이 23억원과 5만섬 이상의 양곡을 착복한 국민방위군 사건(5.13) 등의 실정을 거듭한 이승만은 1952년 1차 임기가 끝났을 때는 지지기반이 약한 국회에서 간접선거로는 다시 당선되지 못할 것이 확실. 이에 이승만은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을 야기한바 있다.(5.25)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