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
- 최초 등록일
- 2010.04.01
- 최종 저작일
- 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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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왕안석
목차
Ⅰ. 序論
Ⅱ. 本論
1. 王安石의 身世
2. 新法 실시의 시대적 배경
3. 王安石의 新法
4. 新法 실시의 한계와 좌절
Ⅲ. 結論
《參考文獻》
《부록》
본문내용
Ⅰ. 序論
王安石은 도덕과 인치를 중시한 유교사상의 전통 속에서 볼 때 매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 사상가이자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그는 유교사상의 도덕주의적 전통에 안주하지 않고 이른바 法治를 주장한 제도개혁가였으며 또한 이를 과감히 실천에 옮긴 인물이기도 하다. 王安石의 思想은 오히려 이 같은 성격 때문에 傳統時代에서는 온당하게 평가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자학의 확립 이후 그와 대립한 舊法黨의 입장이 정론으로 인정되면서 혹평과 배척의 대상이 되고 말아 단지 詩文家로서만 그의 이름을 전할 수 있었다.
E.H 카는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어려움은 과거에도 겪었을 것이다. 과거의 문제점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현재 우리의 삶이 윤택해지기를 지향하는것이 역사공부를 하는 이유일것이다.그래서 그 중에서도 “宋”나라의 재정적 파탄을 타개하면서 儒敎主義的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방안으로 민생안정을 힘쓴 王安石의 新法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본문에서는 王安石이 살았던 시대적인 배경, 王安石의 身世 그리고 王安石의 新法 및 한계점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Ⅱ. 本論
1. 王安石의 身世
북송 眞宗의 천희(天禧) 5년(1021년)에 王安石은 임강군(臨江軍: 강서) 判官 王益의 아들로, 그 임지에서 태어났다. 중견관료였던 부친을 따라 그 임지를 전전하고 있었다. 소주(韶州: 광동 소관), 수도 개봉(開封), 강녕(江寧: 남경) 등이었다. 그는 22세 때 進士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뒤 지방근무를 자원했다
Ⅲ. 結論
王安石의 改革政策은 오대 軍閥의 橫暴를 종식시킨 宋의 文臣官僚體制의 軍事的 脆弱性은 契舟, 서하의 軍事的 壓迫을 힘겹게 넘기기는 하였으나 宋代의 생각 있는 官僚로서는 누구나 禁軍을 基盤으로 하고 있는 募兵體制의 비효율성을 지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王安石의 强兵策은 國初이래 제기되어 오던 이러한 군사제도의 문제점을 고쳐보려는 데 의도하였다. 이와 함께 文臣官僚體制에 의한 冗官의 대두와 官僚社會의 비효율성과 부정부패는 북송의 전성시대로 일컬어지고 있던 인종대에 이미 舊法黨으로 분류되고 있던 범중엄의 개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계속해서 개혁의 필요성은 王安石의 改革政策에 철저히 반대를 한 보수파의 司馬光까지도 역설한 것이다.
이러한 개혁의 필요성은 현실의 대응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貨幣經濟의 확대를 통하여 현실적으로 국가재정과 조세확보문제를 해결해 보려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 정책에서도 보았듯이 부분적인 개혁이 아닌, 그리고 당시대의 문제점만을 해결하기 위한 미봉책으로서가 아닌 미래지향적인 宋社會의 전반적인 개혁을 하고자 했다는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