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4·3 항쟁의 배경
1. 해방 이후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활동
2. 1947년 3·1시위와 3·10총파업
Ⅲ. 4·3 항쟁의 전개과정
1. 무장봉기
2. 초기 무력 충돌
3. 주민 집단희생
4. 항쟁의 종결
Ⅳ. 4·3 항쟁의 결과
1.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의 형성
2. 제주도 內 지역 공동체의 파괴
Ⅴ. 맺음말
참고자료
본문내용
Ⅰ. 머리말
4·3항쟁은 1948년 당시 제주도민의 약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비극적 사건이다. 그러나 반공 이데올로기가 4·3항쟁에 대한 기억을 억압함으로써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은 공식적으로는 거론될 수 없었던 망각된 역사였다. 김기봉, 2000년,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 푸른역사 65p 6~10
공식적으로는 거론되지 못하게 한 역사였지만 4·3항쟁에 대한 진상규명을 하려는 움직임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1960년 제주도 출신 국회의원과 제주도민들의 자체적인 진상규명 요구, 1979년 현기영의 『순이삼촌』등은 4·3항쟁에 대한 진실을 알리고자 하였다. 하지만 1990년대 이전까지는 진상규명 자체가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도 많았으며 오히려 다시 금기시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4·3항쟁에 대한 연구 결과 역시 많지 않았다.
4·3항쟁에 대한 연구는 1975년 존 메릴의 「제주도 반란(The Cheju-do Rebellion)」이다. 이 논문은 4·3항쟁에 대한 최초의 논문이었다. 또한 미군 정보보고서 등 미국의 많은 자료를 인용함으로써 국내 학계에 큰 자극을 주었고, 4·3항쟁의 연구 수준을 처음부터 껑충 올려놓았다. 역사문제연구소, 1999년, 『제주 4·3 연구』, 역사비평사 361p 1~11
국내에서는 1988년 양한권의 「제주도 4·3폭동의 배경에 관한 연구」, 박명림의 「제주도 4·3민중항쟁에 관한 연구」가 선구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두 논문 모두 존 메릴이나 브루스 커밍스 등 미국의 한국현대사 전문 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힘입어 국내의 4·3항쟁 연구 수준을 끌어올렸다. 역사문제연구소, 1999년, 『제주 4·3 연구』, 역사비평사 361p 12~17
이후 1989년 제주 4·3연구소가 창립되고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밝혀져야 할 사건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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