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없는 사회에서 살고 싶소이다.
- 최초 등록일
- 2010.06.26
- 최종 저작일
- 2009.05
- 20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중인의 여항문화를 통해 들여다본 삶
목차
서론 : 중인들의 사회적 위치
본론1.
가. 여항인은 누구?
나. 여항인의 결정체 : 조희룡
다. 위항문학의 정점 : 옥계시사
본론2. 그들만의 이데올로기
가. 시사 ‧ 위항문학운동
나. 여항시
다. 서얼통청운동
라. 문명개화사상
<참고문헌>
본문내용
서론
앞 선 발표에서 우리는 중인들이란 과연 무엇을 지칭하고 어떤 일들을 하였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 개념이 매우 중요한 바, 본론에 들어가기 전 한 번 더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또한, 중인들의 문화생활과 관련하여 시대를 거듭할수록 보다 방대해지고 범위도 넓어지는 바, 발표를 통해 다 다룰 수 없음을 감안하여 본론1을 통해 주요 예를 통해 그 단면을 살펴보도록 한다. 그리고, 본론2를 통해 그 흐름을 되짚으며 그들의 지향의식에 대해 논의함으로써, 실질적인 결론을 대신하도록 한다.
중인의 사회적 위치
조선조에는 원래 인적 계층관계가 확립되어 있어서 엄격하게 계층제가 준수되었다. 초기에 법제적 신분은 양인과 천인으로 규정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분화되어 16세기경에는 양반, 중인, 평민, 천인으로 계층이 형성되었다.
중인은 대체로 고려말 조선초에서부터 양반에서 도태되거나 양인에서 상승한 자들로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중엽에 이르러 하나의 계층으로서 확연히 모습을 드러낸 중간신분층이었다. 정3품까지 승진할 수 있는 역관(譯官), 의관, 산원, 율관 등 상급 기술관과 정7품이 한품(限品)인 천문관, 도류(道流), 화원(員畵) 등의 하급 기술관, 그리고 녹사, 서리들이 이에 속했다. 지방에는 관계에 들지 못한 향리, 군교 등이 있었다. 대체로 이들은 양반에는 미치지 못하나 양인보다는 우위에 있던 일련의 하층 지배계급이었다.
양반관료제 사회에서 상층 지배계급이었던 양반은 정책입안에만 관계했고, 번거로운 행정실무는 중인들이 도맡았다. 생산노동은 양인과 천민에게 책임지워 계층적인 지배구조가 완성되었다. 중인의 명칭이 유래된 데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현재 가장 유력한 설은 `서울의 조시(朝市)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중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곧 중인들은 서울의 고관대작들이 많이 살던 가회동이나 삼청동 등 북촌과 세력을 잃은 빈한한 선비들이 살던 남산 회현동의 중간지점인 청계천 일대에 거주하여 이런 명칭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중인들이 그들의 직업과 우수한 역량을 통해 상당한 경제력과 실력을 쌓았다. 이를 배경으로 한말 이후 근대화에 앞장 서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강명관,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창작과비평사 1997.
한국고문서학회, 『조선시대 생활사.2』역사비평사 2000.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韓國近代移行期 中人硏究』신서원 1999.
정옥자, 『조선후기 중인문학연구』일지사 2003.
정옥자, 『조선후기 문학사상사』서울대학교출판부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