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 최초 등록일
- 2010.12.13
- 최종 저작일
- 2010.12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한국사의 이해-조광조
직접 조광조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편집하고, 다듬고, 생각을 반영한 창작 리포트입니다. A+자료이니 안심하고 받으세요.^^
목차
* 들어가는 말
1. 조광조의 생애
2. 당시 정세
1) 훈구파와 사림
2) 중종 대 사림의 정계 진출
3. 조광조의 개혁정책
1) 향약실시
2) 현량과실시
3) 소격서 폐지
4) 정국공신의 위훈삭제, 그리고 기묘사화
4. 평가
참고자료
본문내용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간, 그래서 38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인물 조광조.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흔히‘광인’또는‘화태’라고 불렀지만, 훗날 그는 우리나라 성리학 발전에 한 획을 그은 뛰어난 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이야기할 때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조광조를 거론한다. 그가 주장한 개혁정치의 내용이 무엇이었기에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큰 의미를 주고 있는 것일까? 또한 당시의 정세와 분위기가 어떠했기에 기묘사화의 불길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을 바탕으로 조광조의 생애 및 개혁정책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 후 기묘사화가 발생하게 된 배경과 그 원인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조광조의 생애
『조광조는 조선조 중종 때의 성리학자로서 이름은 광조, 자는 효직이며 호는 정암이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조온의 5대손으로 성종 13년인 1482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시호는 문정이고 본관은 한양이다.』
조광조가 성리학에 몰두하게 된 계기는 17세 때 당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희천에 유배된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부터이다. 김굉필은 조선 성리학의 문을 열었다고 하는 김종직의 수제자였다. 그런 김굉필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하게 된 조광조는 1510년 29세의 나이로 소과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다. 34세가 되는 해인 1515년에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로 종 6품직에 오를 수 있게 되었고 같은 해 대과에 합격해 사간원의 언관직에 임명되었다.
『신진관료로서 패기와 재능을 갖추고 있던 조광조는 중종의 눈에 띄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승진을 거듭했다. 그리고 벼슬길에 나선 지 3년 만에 사헌부 대사헌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대사헌은 요즘의 검찰 총장에 해당하는 직책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조광조는 자신이 평소 꿈꾸어 온 이상 정치를 실행하고자 개혁의 칼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특히 그는『도학을 숭상하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음으로서 지치를 일으킬 것을 주장하는 지치주의 에 입각한 왕도정치를 실현코자 하였고, 요․순 시대의 이상 정치를 목표로 정치․사회적 모순의 시정을 주장하였다.』그러나 반대파인 훈구파의 반발로 발생한 1519년 11월 15일 기묘사화로 목숨을 잃게 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