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지철, 지강헌, 전태일, 여운형
- 최초 등록일
- 2012.05.28
- 최종 저작일
- 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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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사는 게 이 사회다, 돈이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 법이 이렇다. ” 탈주범 지강헌의 발언이다.
88올림픽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1988년 10월 8일 서울 영등포 교도소에서 대전과 공주 교도소로 이송중이던 미결수 12명이 호송버스를 탈취한 대탈주 사건이 벌어진다. 이들 중 8일간 7명은 잡혔으나 나머지 5명은 잡히지 않은채 여러 은신처를 돌며 서울시내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든 사건이다.
예전부터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으나 지강헌이 어떤 인물인지, 왜 그러한 인질극을 벌였는지, 그리고 대탈주의 배경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이들 탈주범의 우두머리인 지강헌, 그에게 이 탈주는 단순히 순간적 충동심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를 가진 최후의 수단이었다.
주목해야할 점은 5공화국에서 제정된 타당하지 못한 법적 제도와 이 타당하지 못한 법들이 일부 국민에게만 제한적으로 절대적 잣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80년대 전두환 정부에서 내세운 보호감호라는 제도에 의해 죄의 형량이 터무니없이 크게 매겨졌고, 이러한 법이 일부 돈있는 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어이없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 시대 그 정부에서는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 하였으며 이로 인해 지강헌이 불만을 품고 비 합리적인 사회상을 폭로한 대변인이 된 것이다.
목차
1)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강헌
2)각하가 곧 국가다- 차지철
3)꺼지지 않는 불꽃- 전태일
4)좌우를 넘어 민족을 하나로- 여운형
본문내용
Ⅳ. 좌우를 넘어 민족을 하나로 여운형
숨막히는 일제의 통치 속에 여운형은 많은 국민들의 힘이었다. 국민이 인정한 역량의 정치지도자가 바로 여운형,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진정한 정치가였다.
해방이후 건준과 같은 조직이 설립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굉장한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임시정부를 포함하여 중요한 독립운동단체는 이미 해외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해방이 되기 전부터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동맹이 만들어졌고 해방이 된 이후부터 바로 건준이라는 조직이 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선의 치안유지가 가능했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치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굉장히 의미있는 일이었다.
1918년 33살의 여운형은 신한청년당 결성을 주도한다. 1차 세계대전의 종전 협상인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알릴 대표로 김규식과 여운형이 선출됐고 청년단원들은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3·1운동의 준비과정을 도왔다. 여운형을 비롯한 이 젊은 청년단원들은 세계의 정세를 잘 알고 있었고 독립운동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이 신한청년당의 중심에 여운형이 있었다. 그는 조선 독립운동의 주창자이자 심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에게 조선의 독립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았고 중국에서는 국민당에 가입하는 한편 국공합장에 참여해 공산당을 도운 인물로서, 이념과 국경을 넘나드는 그의 행보는 조선 독립을 위한 과정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