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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2.09.08
- 최종 저작일
- 2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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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오원 장승업의 생애, 오원 장승업의 작품경향, 오원 장승업의 화풍, 오원 장승업에 대한 평가 분석
목차
Ⅰ. 개요
Ⅱ. 오원 장승업의 생애
Ⅲ. 오원 장승업의 작품경향
Ⅳ. 오원 장승업의 화풍
Ⅴ. 오원 장승업에 대한 평가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개요
조선시대의 회화는 고려시대까지 큰 비중을 차지했던 불화가 쇠퇴하면서 일반회화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대의 회화는 왕조통치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교화를 이룩하고 인륜을 돕는 데 긴요한 시각매체로서 적극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왕조 운영의 지도세력으로 문화상황을 이끌었던 문인사대부들의 미술로 즐겨 애용되면서 당시 조형예술의 대종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사대부들은 고려 후기에 관료지식인으로 새롭게 등장한 문사들의 회화관을 계승하여 시와 함께 그림을 상호간의 감흥교환과 심의표출 및 심성수양의 매체로 삼으면서 이 시대 회화발전에 계도적인 구실을 했다. 국가에서는 개국 초부터 회사(繪事)를 전담하는 도화서(圖畵署)를 확장?설치하고 화원들을 양성하여 이러한 회화상황의 정착과 발전에 기여하도록 했다.
<중 략>
Ⅴ. 오원 장승업에 대한 평가
그림에 전념한 장승업은 놀라운 기량과 넘치는 신운(神韻), 그리고 왕성한 창작력으로 금새 놀라운 명성을 얻었다. 그는 마치 전생에 화가였던 듯 샘솟는 영감(靈感)을 기운 넘치는 필력(筆力)으로 쏟아내었으며 당시 화단의 총아로 부상하였다. 그의 명성은 궁중에까지 알려져 고종(高宗)의 어명에 의해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승업은 일체의 세속적인 관습에 구애받지 않으려 하였고 결국 그림을 구하는 사람들의 사랑방과 술집을 전전하며 간혹 작품 활동을 하는 등 뜬구름 같은 일생을 보내다 1897년 광무 원년에 생을 마쳤지만 그가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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